삼일회계법인 이진규 파트너가 4일 발표한 지속가능성 공시 현황
CBAM과 ESRS는 관세율 인상보다 더 복잡한 방식으로 한국 수출기업의 체력을 시험하는 규제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한국이 이 흐름을 ‘또 하나의 무역장벽’으로 인식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유럽이 제시하는 새로운 규제가 지구촌의 표준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아서가 결코 아니다. 그동안 한국이 취약했던 ‘공시·거버넌스’을 눈에 띄게 향상시킬 계기로 삼으라는 차원이다.
한국 기업들의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기업 이해관계자 분석 및 보고(공시) 수준이 유럽 기업들에 견줘 뒤쳐지지 않는다. 물론 상당한 비용이 뒤따르겠지만, 규제대응 자체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럽규제에 겁 먹을 필요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유럽 스스로가 자신들이 만든 규제를 감당할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지구촌 맞수 미국・중국은 유럽 규제를 지구촌 표준의 지위로 인정할 리가 만무하다. 한국은 명분(유럽)과 돈(미중) 사이에서 실리를 챙기는 피벗(Pivot)만 잘 하면 된다, 다만 스텝이 꼬이지 않게.
보수적 접근이 맞다
CBAM과 ESRS는 유럽이 역외 기업(정부)를 자신들의 경기장에서 자신들의 형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일종의 윤리규범이다. 규범은 탄소배출량 숫자 보고를 넘어 기업이 어떤 주제를 왜 중요하다고 보는지, 그 판단 과정과 내부통제가 감사·인증의 직접 대상이 되는 구조로 돼 있다.
한국의 회계 전문가들은 우선 ‘도대체 이 규범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라는 보수적 접근을 궁리한다.

삼일회계법인 소속 이진규 공인회계사(파트너, 위 사진)는 4일(서울 시간) 한국공인회계사회가 개최한 ‘제22회 지속가능성인증포럼’에서 유럽 첫 해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대한 인증 결과를 소개하며, “공시 사례 자체는 많지만 이를 자사 전략과 환류(feed back) 고리로 연결하는 분석이 여전히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지속가능성 공시의 양과 질은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으며, 관건은 ‘공시 내용의 구조’가 기업 자체 ‘중요성 평가’와 맞아 떨어지느냐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미국을 제외한 주요 서방국가들은 환경・사회・거버넌스(ESG) 공시를 제도화하고 있다. 한국도 이런 추세를 의식해 지난 2025년부터 지속가능성 공시를 법으로 의무화 하자고 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한 해 순연됐다. 2026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의무화할 예정이다. 하지만 아직 공시 기준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금융위원회는 국내 지속가능성(ESG) 공시 기준 관련 최종안과 로드맵 초안을 빠르면 2월말 발표할 예정이다.
수치화, 점수화 단계 못미쳐…그런데 꼭 그렇게 가야할까?
한국 기업들의 지속가능성 공시 사례를 보면 ESRS 중요성 평가의 ‘수식’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날 포럼에서 ‘EU 지속가능성보고 및 국내 중요성 평가·공시주제 현황’을 소개한 전홍민 성신여대 교수(아래 사진)는 “2024년에는 기업의 43.5%가 ESRS 분석 프레임을 사용했다고 공시했지만, 실제로 ESRS가 제시하는 영향·리스크·기회 산식을 계산식 형태로 공개한 사례는 거의 없다”고 밝혔다.
전 교수는 “현대차·기아, SK이노베이션, 롯데케미칼, 현대제철 등도 ESRS 프레임에 맞춰 영향·리스크·기회를 구분하고 심각성 요소를 제시하지만, 최종 점수 계산 로직은 대부분 내부 기준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SRS는 실제 영향의 심각성을 ‘규모(Scale)×범위(Scope)×회복불가능성(Irremediability)’, 잠재 영향은 ‘심각성×발생가능성(Likelihood)’, 재무적 리스크·기회는 ‘잠재재무영향×발생가능성’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기업은 극히 드물다.
지속가능성 공시 때 기업활동이 ‘외부에 미치는 영향’과 ‘외부 요인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 두 방향을 함께 판단, 핵심 이슈를 선별하는 ‘이중 중요성(double materiality)’ 개념이 있다. 전 교수는 “이 개념이 형식적으로 도입됐는지 여부보다, 어떤 절차와 판단 기준을 통해 중요성이 도출됐는지를 평가하는 정형화된 모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CBAM과 ESRS가 결합된 새로운 규제환경에서, 한국 기업과 정책당국이 “양보다 질, 결과보다 과정”에 방점을 찍는 공시체계로 빨리 전환하느냐가 향후 수출 경쟁력의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유럽, 실력 안되니 ‘규칙설계자’의 길 선택..그나마도 속도조절
유럽연합(EU)이 CBAM·ESRS 같은 규제를 강행하는 사연은 복잡하다. EU는 이미 “미국·중국처럼 싸고 빠른 성장 모델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래서 EU가 택한 길은 성장률이 아니라 규칙 설계자(rule maker) 지위다. 경제를 키워 제조의 우위를 갖기엔 불가항력적이니 시장접근권, 통제력, 곧 경제의 ‘입구’를 지키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사실 유럽은 노벨상, 미디어 등 연성권력(soft power)으로 지구촌 강대국들을 견제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대리전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유럽의 입지(position)은 완전히 무너졌다. 값싼 러시아 파이프라인가스(PNG)를 더이상 쓰지 못하게 됐고, 국제사회에 일관된 평화・인권・규칙을 설득할 수 없을 정도로 스텝이 꼬여버렸다.
특히 EU는 CBAM·ESRS 같은 규제가 제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종전이 다가오자 “에너지·안보·산업을 동시에 잃으면, 규제의 도덕적 우월성도 의미가 없다”는 자각에 이른 것이다. 속도조절에 나설 수 밖에 없다. 준비해온 CBAM·ESRS 등 지속가능성 주도권(Green Deal)을 철회하는 게 아니라 적용 속도·범위·강도를 미세조정(Fine Tuning)하고 있다. 적용 대상을 축소하거나 단계화 하는 추세도 뚜렷하다. 상장 중소기업(SME) 적용을 연기 또는 면제하고 EU 이외 역외 적용 범위 축소도 논의 중이다.
“보고는 하되, 감사 강도는 완화”하는 이중구조(two track)를 구사하하고 있다. 가령 CBAM은 겉으로는 강경하지만 실제 구조는 꽤 유연하다. 초기엔 보고 중심이고 인증서 구매는 점진적을 시행할 방침이다. 산업별 예외·전환기간도 계속 추가하고 있고, 탄소배출권(EU ETS) 무상할당 축소도 속도조절 중이다.
발 없는 자본 "미국 기준이 더 매력적"
미국과 중국이 EU 규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는 점도 중요한 관점이다. EU 규제가 ‘윤리적 우위’를 전제로 설계됐지만, 미국은 돈으로, 중국은 구조로 각각 그 규제의 근간을 허물 수 있다는 관점이다.
미국은 규제 대신 보조금으로 게임의 성격을 바꾼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대표적이다. 유럽처럼 공시를 강제하거나 이중중요성, 공급망 전면 투명성 같은 걸 따지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보조금에 세액공제로 EU 규제를 무력화시킨다. 미국은 “탄소가격도 명확하지 않은데 무슨 CBAM 계산을?”이라는 논리를 앞세운다. 또 주(州) 단위 규제로 연방 책임을 분산시킬 수도 있다. 앵글로색슨 국가들의 전형적인 국제규제 회피 꼼수다.
이런 상황에서 지구촌 투자자금들이 EU에게 “오! 너 참 훌륭한 제도를 마련했구나?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서류 다 작성해줄게. 잘 심사해 다오!”라고 ‘자승자박’할 이유가 없다. EU 내부에서도 “그린딜이 산업을 미국으로 밀어낸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는 이유다.
미국에서는 ESG를 의무공시’에서 ‘자율 공시’로 격하시키는 분위기다. 구체적으로 ▲국제회계기준(ISSB)이 ‘단일중요성(single materiality)’이라는 점 ▲투자자에게 중요한 것만 공시한다는 점 ▲지역사회·인권은 의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구촌 최소 기준만 제시하는 미국 기준이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EU의 ESRS를 지역 규칙(local rule)으로 고립시키는 효과도 있다.
중국, 고탄소산업 제3국 이전
G2로 부상한 중국은 일견 규칙을 인정하는 식으로 반응하지만, 뿌리부터 해석이 다르다. “지구온난화(기후변화)의 주범이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를 마구 써온 선진국들이면서 이제 와서 그 대응비용을 개발도상국에 물리는 파렴치한 작태”라는 전략적 메시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은 구체적으로 공급망을 분산, CBAM을 무력화 시키고 있다. 고탄소 공정을 제3국으로 이전하고, 최종 조립만 자국이나 저탄소 국가에서 하는 식이다. 도저히 탄소중립 목표에 부합하지 못하면 ‘중국산 아님’ 표시로 출시한다. 사실상 중국산 제품에 깃든 탄소 총량은 조금도 줄지 않지만 CBAM 계산서에서는 사라질 수 있다.
한국은 미중 vs 유럽 사이 피벗하는 입장
한국은 EU와 미국 사이에서 양자 제약식(constraint) 하에서 국익을 극대화 하는 함수를 설계 중이다.
중국처럼 유럽 규제를 뿌리부터 불신하고 싶지만, 딱히 그럴 이유가 없다. 복잡한 규제라고 허둥댈 이유도 없다. 자기 발목을 잡고 스텝이 꼬인 유럽의 일정을 따르는데 큰 지장도 없다.
미국·중국식 회피 기술을 참고, 적당한 피벗으로 유럽의 애간장을 태우며 다른 통상 이익을 구가할 수도 있다. 애매하지만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나 할까.
EU 규제를 무역장벽으로 볼 필요는 더더욱 없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동안 부족했던 주주, 이해관계자 중시 경영의 기법들을 익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에 EU의 CBAM·ESRS 만큼 좋은 교과서가 없다. 공시·거버넌스 역량을 수출경쟁력의 일부로 흡수한다고 생각하면 틀림 없다.
EU가 ‘규칙으로 버티는 경제’를 성공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레 엄살 떨 필요가 없다. 분명 한국은 그 규칙을 ‘비용’이 아니라 ‘무기’로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편 한국은 관세 압박 미국에는 EU의 규제를 적극 지지・수용・천착(후벼 구멍을 뚫다)하는 식으로 ‘쉬운 여자’가 아님을 보여줘야 한다.
이상현 <엔트로피>편집위원
러시아 <스푸트니크> 한국특파원, 서울외신기자클럽(SFCC) 회원, 아시아기자협회(AJA) 회원,
지구촌 팩트체크기구 GFCN 회원. 고정 칼럼 [엔트로피 網] 등을 집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