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앞에 무너진 환경보호.. EU, 산림파괴 금지법 시행 연기

  • 등록 2025.12.20 17: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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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공급망 안정·기업 부담 완화 이유로 택한 고심 끝 악수
중소기업, 개발도상국 생산자들 추가 비용 늘어 경쟁력 약화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환경 보호라는 전 지구적 당위조차도 현실의 냉엄한 벽을 넘지 못하고 좌초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산림파괴를 막기 위해 도입한 핵심 환경 규제의 시행을 또다시 연기하면서 환경 보호와 산업 현실 사이의 무게추가 어디에 기울어져있는 지를 명확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 안정과 기업 부담 완화를 고려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지만 애초에 정해진 일정을 뒤집는 것은 정책 일관성과 신뢰성을 무시한 결정이라는 분석이다. 무엇보다 지구 환경 보호는 기업 이익이나 글로벌 경제 안정을 뛰어넘는 가치라는 점에서 이번 결정을 두고 논쟁이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 사실상의 후퇴 조치.. 산림 파괴 막을 적기 놓칠 수도
로이터는 지난 18일(현지시각), EU 회원국들이 산림파괴 금지법(EU Deforestation Regulation)의 시행을 1년가량 연기하는 방안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당초 이 법은 2025년 말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기업과 회원국들의 준비 부족을 이유로 일정이 조정됐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법안은 커피, 코코아, 팜유, 목재, 고무 등 산림 훼손과 직결되는 원자재를 대상으로 한다. EU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려는 기업은 해당 원자재가 산림 파괴와 무관하게 생산됐음을 입증해야 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시장 접근이 제한되거나 제재를 받을 수 있다.

 

로이터는 “기업들이 새로운 규제를 준수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 반영됐다”며 “준비 없이 시행될 경우 공급망 전반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고 전했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구조상 해당 규제는 단순히 유럽 내부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원자재를 생산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국가의 농가와 기업들까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생산자는 생산 이력 추적 시스템과 인증 절차를 새롭게 마련해야 하며, 이는 상당한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는 기업들의 반발로 이어졌다. 다국적 식품·유통 기업들은 규제 도입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모든 공급망을 추적하고 검증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과도하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한 유럽 유통업계 관계자는 “수천 개에 달하는 공급업체의 생산 이력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규제가 시행될 경우 시장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로이터는 앞선 보도에서도 “중소기업과 개발도상국 생산자들이 특히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규제 준수를 위한 비용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반면 환경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법 시행이 지연될 경우 산림 파괴를 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부 단체는 이번 결정을 두고 사실상 정책 후퇴라고 평가했다. 한 환경단체 관계자는 “이미 수년간 준비 기간이 주어졌음에도 다시 시행을 미루는 것은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는 신호”라며 “EU의 기후 대응 리더십이 흔들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 정책 방향과 실행 사이의 괴리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
이번 논란은 EU가 추진해온 ESG 정책의 현실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해석된다. EU는 그동안 기후변화 대응과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해 강력한 규제를 도입해 왔지만 실제 시행 단계에서는 산업계 부담과 경제적 영향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정책 방향과 실행 사이의 괴리”라고 지적한다. 환경 보호라는 목표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구조적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유럽 통상 전문가는 “환경 규제는 장기적으로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산업 경쟁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이번 결정은 정책 후퇴라기보다 속도 조절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치는 글로벌 무역 질서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산림파괴 금지법은 단순한 환경 정책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무역 규제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개발도상국에서는 해당 규제가 비관세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생산 과정의 투명성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 EU 시장 접근이 제한될 수 있어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이터는 “환경 기준이 글로벌 무역의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며 “기업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연기가 일시적인 조치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회원국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향후 추가적인 일정 조정이나 기준 완화 논의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특히 농업 및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규제 강화를 부담으로 느끼는 반면, 일부 회원국과 환경단체는 보다 강력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어 정책 방향을 둘러싼 내부 갈등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EU 정책의 일관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력한 환경 규제를 내세우면서도 실제 적용 단계에서는 반복적으로 유예가 이뤄질 경우 정책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ESG 정책이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기업 부담과 공급망 안정성을 고려하지 않은 규제는 지속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에서다.

 

한 경제 분석가는 “앞으로의 ESG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실제 실행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될 것”이라며 “환경과 경제 간 균형을 찾는 과정이 본격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번 EU의 결정은 환경 보호와 산업 경쟁력이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러한 조정이 반복될 경우 정책 추진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EU의 대응 방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손영남 기자 son364@entropy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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