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인공지능(AI)이 석유·가스 산업의 생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생산 데이터를 분석해 유정 생산량을 높이는 것은 물론 시추 과정의 이상 징후를 실시간으로 찾아내 작업 시간을 대폭 줄인다.
나아가 설비 고장을 사전에 예측해 정비하는 등 현장 의사결정 전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특히 AI가 단순히 사람의 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생산과 시추 과정의 판단을 자동화하는 단계로 발전하면서 산업의 비용 구조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산업에 참여하는 모든 기업이 같은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시추 시간이 줄면 운영사는 장비와 인력에 투입하는 비용을 아낄 수 있지만 작업일수를 기준으로 대가를 받는 서비스 기업에는 매출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AI가 만들어낸 효율이 한쪽에는 이익이면서 다른 쪽에는 기존 사업의 위협이 되는 셈이다.
결국 AI의 확산은 석유·가스 기업의 생산성 경쟁에 그치지 않는다. AI로 만들어진 경제적 가치를 누가 가져갈 것인지, 이를 기존 계약과 사업모델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가 새로운 경쟁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 2300억달러 경제가치 창출.. 생산·시추 최적화서 자율운영으로
맥킨지는 지난 25일 공개한 ‘Can upstream oil and gas produce value from AI’s $230 billion pay zone?’ 보고서에서 상류(upstream) 석유·가스 산업의 AI 활용 사례를 분석했다. 맥킨지는 550개 이상의 AI 활용 사례를 검토한 결과 현재 기술과 도입 수준을 기준으로 연간 약 650억달러의 경제적 가치가 발생할 수 있으며 AI 기술이 성숙하고 자율운영이 확대될 경우 잠재가치는 최대 2300억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맥킨지가 제시한 2,300억 달러라는 수치는 AI 솔루션이나 관련 장비 자체의 시장 규모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석유·가스 생산 공정에 AI를 도입했을 때 얻게 되는 추가 생산량과 절감되는 비용을 종합적인 경제적 가치로 추산한 결과다. 특히 이 금액은 데이터 인프라 구축과 컴퓨팅 파워, 소프트웨어 도입, 전문 인력 확보 등 AI 구현에 투입되는 제반 비용까지 모두 고려해 산출되었다.
현재 석유·가스 산업에서 AI가 제공하는 가장 중대한 기회로는 생산 최적화가 꼽힌다. 시추 및 생산 현장에서는 압력과 온도, 유량, 장비 건전성 등 방대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쏟아지기 마련이다. AI가 이러한 데이터를 유기적으로 분석해 장비의 과부하나 고장 위험을 최소화하는 최적의 운전 조건을 도출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생산 효율 극대화와 운용 비용 절감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여러 변수의 관계를 하나씩 분석해 판단하던 작업을 AI가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점도 차이다. 생산량 변화나 장비 상태에 따라 운영 조건을 다시 계산하고 최적의 대응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시추 역시 AI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영역으로 거론됐다. 시추 과정에서는 지질 정보와 시추 장비 데이터, 압력과 진동 등 다양한 정보가 동시에 발생한다. AI가 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면 이상 징후를 조기에 파악하거나 시추 순서를 조정하고, 불필요한 작업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이 데이터를 확인한 뒤 지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판단한 뒤 설비가 스스로 대응하는 자율운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AI의 가치가 특정 영역에 집중되는 것도 특징이다.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550개 이상의 활용 사례 가운데 상위 10개 사례가 전체 가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상위 20개가 약 3분의 2를 차지한다. AI를 도입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생산량 증가와 비용 절감으로 바로 연결되는 활용 사례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 시추 3일 줄였더니 매출도 3일치 감소
문제는 AI가 효율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기존 산업의 수익모델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령 한 유정의 시추에 10일이 걸리던 것을 AI를 활용해 7일로 줄였다고 가정해보자. 운영사는 장비 임차료와 현장 인건비 등 3일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시추 기간이 짧아지면서 다음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시점도 앞당겨진다.
그러나 시추업체가 장비를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를 기준으로 대금을 받는 계약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기존에는 10일 동안 발생하던 매출이 7일로 줄어든다. AI가 운영사에는 비용 절감 수단이지만 서비스사에는 매출 감소 요인이 되는 구조다.
이 같은 변화는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전체의 계약 구조와 연결된다. 석유·가스 산업에서는 오랫동안 장비 사용 기간이나 작업량을 기준으로 서비스 비용을 산정하는 계약이 활용돼 왔다. AI가 작업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할수록 이 같은 방식과 기술의 목표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맥킨지는 AI 확산이 유전 서비스·장비업체(OFSE)의 기존 사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수준의 AI 도입만으로도 기존 매출 가운데 약 170억달러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AI가 최대 수준으로 확산될 경우 영향 규모가 600억달러까지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서비스 기업이 AI로 인해 무조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AI를 활용해 단순 작업을 줄이는 동시에 새로운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 데이터를 분석해 운영 효율을 높이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거나, AI 기반 예측정비와 생산 최적화를 서비스 형태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기존의 작업량에 돈을 받는 사업에서 성과에 돈을 받는 사업으로 얼마나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느냐다. 맥킨지가 제시하는 방향도 여기에 맞춰져 있다. AI 소프트웨어를 구독하는 SaaS 모델, AI 도입으로 실제 비용이 얼마나 감소했는지를 기준으로 대가를 지급하는 성과 기반 계약, 비용 절감이나 생산량 증가로 발생한 경제적 이익을 발주사와 서비스사가 나누는 게인 셰어링(gain-sharing)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방식에서는 서비스 기업이 AI를 통해 고객의 비용을 줄이는 것을 자신의 매출 감소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객에게 만들어준 경제적 가치 자체를 새로운 매출원으로 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 계약이 시추 장비를 하루 빌려주는 대가를 지급하는 구조였다면 새로운 계약에서는 시추 기간을 얼마나 줄였는지 또는 생산량을 얼마나 늘렸는지를 기준으로 대가를 받을 수 있다. AI가 만들어낸 효율이 서비스 기업의 매출을 깎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익원이 되는 구조다.
이 때문에 석유·가스 산업의 AI 경쟁은 단순히 어떤 기업이 더 좋은 AI 모델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현장 데이터를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지, AI의 판단을 실제 설비 운영에 얼마나 연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발생한 경제적 가치를 계약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는 의미다.
국내 에너지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정유·가스뿐 아니라 플랜트와 엔지니어링, 발전, 제조 등 대규모 설비를 운영하는 산업에서는 AI를 활용한 예측정비와 운영 최적화가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앞으로 AI를 얼마나 빠르게 도입할 것인지만큼 중요한 것은 AI 도입으로 발생한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어떻게 사업적 가치로 전환할 것인가다. 발주사와 협력사가 기존 계약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AI를 추가하는 데 그칠지, 아니면 AI가 만들어낸 성과를 기준으로 비용과 수익을 다시 설계할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