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전기차 충전 시장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과제는 하나였다. 전기차가 늘어나는 만큼 충전기를 더 많이, 더 빠르게 깔아 인프라 부족을 해소하는 것이 그것이다. 때문에 이용자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속도로 충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곧 시장의 목표였다.
하지만 국내 전기차 보급량이 100만 대를 넘어서면서 시장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충전기 수량만 따지는 경쟁은 이미 끝났다. 충전 시점과 수요 제어, 그리고 배터리 전력의 활용 방식이 시장의 새로운 승부처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25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EV트렌드코리아 2026'은 이 같은 산업의 변화를 보여주는 무대다. 완성차업체뿐 아니라 배터리, 충전 인프라, AI, 전력망, 친환경 건설기계 기업까지 대거 참여한다. 전기차 산업의 경계가 자동차 제조를 넘어 에너지와 소프트웨어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과거의 충전이 전기를 넣는 일이었다면 앞으로의 충전은 전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일에 가까워지고 있다.
◆ 설치 대수보다 충전 시간, 전력 수요 관리로 진화
이 같은 변화의 출발점은 전기차 충전이 주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주유는 길어도 몇 분이면 끝나는 일이지만 전기차 충전은 짧게는 수십 분, 길게는 몇 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역설적으로 이 시간적 차이가 전기차를 전력망의 유연한 자원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당장 움직일 차가 아니라면 전력 수요가 몰리는 저녁 시간대를 피해 충전을 몇 시간 미룰 수 있고 반대로 태양광 발전량이 많은 시간대에는 충전을 유도할 수도 있다.
차량 한 대가 소비하는 전력량은 크지 않을지 몰라도 수십만 대가 하나의 플랫폼으로 연결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개별 차량의 충전 수요를 묶어 한꺼번에 조절할 수 있다면 전기차는 거대한 분산형 수요관리 자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스마트충전이다. 스마트충전은 무조건 빠른 충전을 지향하는 기술이 아니다. 차량이 충전을 필요로 하는 시점과 전력망이 충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점을 맞춰 전력 사용을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변화는 요금체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달부터 공공 전기차 충전시설 요금은 충전 속도에 따라 보다 촘촘하게 나뉜다. 속도가 빠를수록 더 높은 요금을 매겨 이용자의 선택을 유도하고 충전 수요를 분산시키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가격 조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기차 충전이 전력망의 상황과 무관하게 이뤄지는 일률적인 서비스에서 전력 수요를 시간대별로 조절하는 수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충전의 역할이 달라지면서 충전사업자가 해야 할 일도 달라지고 있다. 기업들의 움직임에서도 이런 변화가 감지된다.
현대엔지니어링이 한국전기차충전서비스(한충전)를 흡수합병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오는 11월 합병이 마무리되면 기존 충전소 구축·운영 역량에 한충전이 가진 회원 기반과 플랫폼을 결합하게 된다. 회사는 이를 발판으로 V2G(차량-전력망 연동)와 가상발전소(VPP), 전력중개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할 계획이다.
충전기를 세우고 이용료를 받는 단방향 사업에서 충전기에 연결된 차량과 전력망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 사업으로 시야를 넓힌 셈이다. 이에 따라 충전업계의 경쟁 구도 역시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는 충전기 확보량과 입지, 충전 속도가 주요 경쟁력이었다면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차량을 플랫폼에 연결하고, 그 충전 수요를 얼마나 정교하게 관리할 수 있는지가 승패를 가를 수 있다.
충전기가 많다고 해서 전력망에 무조건 더 큰 가치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연결된 차량을 언제, 얼마만큼 충전할 것인지다. 충전산업의 주도권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이동할 수 있는 이유다.
◆ 배터리도 전력자원으로.. 충전업계 전력시장 정조준
그렇다면 충전 수요를 조절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스마트충전이 전기를 쓰는 시점을 조절하는 기술이라면 다음 단계는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다시 꺼내 쓰는 것이다. 바로 V2G다.
V2G(Vehicle to Grid)는 전기차가 전력을 공급받는 데 그치지 않고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필요할 때 전력망으로 되돌려보내는 방식이다. V2H를 활용하면 가정이나 건물에 직접 전력을 공급할 수도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전기차의 정체성도 달라진다.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필요할 때 전기를 저장하고 다시 방출하는 이동형 에너지 저장장치(ESS)로 역할이 확장되는 것이다.
물론 당장 모든 전기차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량과 충전기 간 양방향 통신 규격과 호환성, 배터리 열화 우려, 전력시장 참여를 위한 제도 정비, 이용자 보상체계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기차 소유자가 왜 자신의 배터리를 전력망에 내놓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전력을 내주는 대가로 명확한 경제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면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전력 피크 완화에 기여한 만큼 확실한 이익이 돌아간다면 전기차 배터리는 강력한 분산형 에너지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V2G의 성패는 기술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 자동차와 충전기를 잇는 플랫폼, 전력시장 제도, 전기요금, 소비자 보상체계가 함께 맞물려야 한다. 충전사업자의 역할도 이 과정에서 커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충전기를 관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수많은 전기차 배터리와 전력망을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까지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기차가 늘어날수록 이 연결망 자체가 하나의 에너지 자산으로 기능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미 현장에서는 이런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 등이 V2G 실증에 나선 가운데 충전사업자들도 V2G와 VPP를 연계해 전력시장으로 영역을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해외에서도 전기차의 양방향 충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기술과 제도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미래 충전 시장을 좌우하는 건 더 이상 충전기 개수가 아니다. 수많은 전기차를 하나로 묶어 충전 시간대를 조율하고 필요할 땐 배터리 전력까지 되돌려 쓸 수 있는 관리 능력이 본게임이다.
전기차 보급 확대와 함께 충전 인프라도 단순한 전력 공급 설비에서 전력 수요를 관리하고 전력망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역할을 넓혀가고 있다. 충전기 숫자로 시장을 선점하는 경쟁에서 연결된 전력을 얼마나 잘 제어하느냐를 겨루는 경쟁으로 넘어가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