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연료 대신 원자로 싣는다.. 한국, 원자력 상선 시대 정조준

35MW급 SMR 2기 탑재.. 25~30년 연료 교체 없는 운항 목표
컨테이너선 넘어 쇄빙선·전력 공급까지.. 규제·경제성은 과제

 

[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원자력 추진 상선이 전 세계에서 쓰는 데가 있어요?”

 

12일 청와대 본관 충무실 앞. 이재명 대통령이 선박용 소형모듈원자로(SMR)가 탑재된 컨테이너선 모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연구진의 답은 간단했다.

 

“상선은 없고 러시아에서 쇄빙선만 쓰고 있습니다.”

 

사실이다. 현재 상용 운항 중인 원자력 추진 상선은 없다. 다만 원자로를 선박의 동력원으로 활용하려는 기술 개발은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에서 이어지고 있다. 상용화된 사례가 없는 만큼 기술과 규제를 먼저 확보하려는 경쟁도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한국도 그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공개된 선박용 SMR은 원전과 조선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시장을 겨냥하는 국내 기술 개발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앞서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용융염원자로(MSR) 기반 1만5000TEU급 컨테이너선 개념설계가 미국선급협회로부터 기본승인(AiP)을 받은 데 이어 이번에는 360m급 대형 컨테이너선에 35MW급 원자로 2기를 탑재하는 구상이 공개됐다. AiP는 개념 단계의 설계가 선급의 기술·안전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는 절차로 실제 선박 건조 승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배 안에 발전소 지어 연료 보급 부담 줄이고 활용처 넓힌다
이날 소개된 선박용 SMR은 대형 컨테이너선에 원자로 2기를 탑재하는 개념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선박 전체 길이는 약 360m이며 약 30m 공간에 35MW급 원자로 2기를 배치한다. 두 원자로의 총 출력은 70MW다. 원자로에서 발생한 열로 증기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 뒤 전기추진 방식으로 선박을 움직이는 구조다.

 

연구진은 선박의 설계수명인 25~30년 동안 핵연료를 교체하지 않고 운항할 수 있도록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제조 원가를 묻자 연구진은 원자로 제작비를 킬로와트당 5000달러 수준으로 낮춰 총 3억5000만달러 규모로 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이는 현재 상용화된 제품의 가격이 아니라 개발 과정에서 설정한 목표치다.

 

선박용 SMR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대형 선박의 연료 문제가 있다. 대형 컨테이너선은 장거리를 운항하는 만큼 많은 연료를 싣고 다녀야 하고 항로에 맞춰 연료를 보급할 수 있는 인프라도 필요하다. 원자력 추진은 이 같은 선박의 에너지 공급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선박연료와 차별화된다.

 

원자로에 한 번 연료를 장전한 뒤 장기간 운항할 수 있도록 설계할 경우 장거리 항해에서 연료 보급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기존 연료탱크에 사용하던 공간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해운업계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LNG를 비롯해 메탄올·암모니아·수소 등 다양한 대체연료를 찾고 있는 것도 같은 배경이다.

 

하지만 새로운 연료마다 저장·운송과 벙커링 인프라 구축, 연료 가격과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뒤따른다. 원자력은 연료를 바꾸는 대신 선박의 에너지 공급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선택지인 셈이다.

 

활용처도 컨테이너선에 한정되지 않는다. 연구진은 향후 북극항로를 오가는 쇄빙선에 적용하는 방안과 연안·도서 지역의 전력 공급원으로 활용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까지 언급했다.

 

특히 쇄빙선은 극지방에서 장시간 운항해야 하는 특성상 장기간 연료를 보급하지 않아도 되는 원자력 추진과 결합할 여지가 크다. 러시아가 실제 원자력 쇄빙선을 운용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다만 이 같은 활용처는 현재 사업화가 확정된 모델이라기보다 연구진이 제시한 향후 가능성이다. 원자력 추진 선박 역시 기존 선박보다 초기 투자비가 높을 수 있고 원자로와 방사선 차폐 설비, 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따라서 장기간 운항에 따른 연료비 절감 효과와 초기 투자·운영비를 종합적으로 따져야 한다.

 

 

◆ 원자로보다 어려운 바다 위 규제.. 한국, 새 시장 선점할까
문제는 원자로를 만드는 기술만으로 원자력 상선 시대가 열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선박용 원자력 기술은 원전 안전 규제와 국제 해사 규제를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여기에 선박이 입항하는 각국의 안전 기준과 항만의 수용성까지 넘어야 한다. 사고 발생 시 책임 주체와 보험, 핵연료 관리, 방사선 안전 등 기존 상선과는 다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규제 정비도 이미 시작됐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올해 들어 핵추진 선박의 안전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앞서 지난해 6월에는 1981년 마련된 핵추진 상선 안전규정을 최신 원자력 기술에 맞게 고치고, 국제 해상인명안전협약의 원자력 추진 선박 관련 규정도 함께 손보기로 했다.

 

국제해사기구는 2030년까지 새로운 핵추진 선박 안전규정과 관련 국제협약 개정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존 국제 규정이 만들어진 지 40여 년이 지난 만큼 새로운 원자력 기술을 실제 선박에 적용하기 위한 제도적 틀도 다시 짜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선박용 원자로 기술 개발은 이어져 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조선업계 등이 해양용 원자로와 선박 적용 기술을 개발해 왔으며, 앞서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용융염원자로(MSR) 기반 1만5000TEU급 컨테이너선 개념설계는 미국선급협회(ABS)의 기본승인(AiP)을 획득하며 국제적인 기술 검증 단계에 진입했다.

 

한국이 선박용 SMR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조선과 원전이라는 두 산업의 경쟁력이 있다. 세계적인 선박 건조 역량과 원전 설계·제조 경험을 결합할 경우 원자력 추진 선박이라는 새로운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번 청와대 보고회에서 360m급 컨테이너선과 70MW급 선박용 SMR 구상이 공개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당장 원자력 컨테이너선이 바다를 누비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원자로 성능 검증부터 선박 시스템 통합, 실증선 건조, 인허가, 국제 규범 정비, 항만 수용성, 보험과 경제성 확보까지 넘어야 할 단계가 많다.

 

결국 관건은 원자로를 얼마나 작고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느냐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실제 선박에 탑재해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 기술과 제도를 함께 갖추는 데 있다. 원자력 상선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기술 개발과 국제 규제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새로운 시장을 둘러싼 경쟁의 조건은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에 남은 과제도 분명하다. 그동안 쌓아온 원전과 조선 기술을 결합해 선박용 SMR의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원자력 추진 선박이 실제 바다를 안전하게 운항하고 세계 각국의 항구에 들어갈 수 있는 제도와 시장의 조건까지 만들어내야 한다.

 

360m 컨테이너선에 원자로 2기를 싣겠다는 구상이 실제 선박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선박용 SMR이 연구실 안의 기술을 넘어 선급의 검증과 국가 차원의 미래기술 논의 테이블에 오르면서 한국 조선·원전업계가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