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반도체 산업의 지방 분산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 반도체특별법이 11일부터 시행되면서 비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를 우선 고려하고 기반시설 구축 비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정부는 이날 광주 군공항 부지를 활용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첫 팹을 2029년까지 완공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을 지역으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이 구체적인 일정표를 갖추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팹 하나를 세우는 것과 반도체 산업을 지역에 뿌리내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반도체 생산에는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뿐 아니라 소재·부품·장비 기업, 전문인력, 연구개발 기반이 함께 필요하다. 공장이 들어선 뒤 주변에 어떤 기업과 인력이 모이느냐가 오히려 지방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얘기다.
◆ 특별법 시행으로 비수도권 클러스터 지원 기반 마련
11일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됐다.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하고 2월 공포된 법률로 시행령에는 반도체 클러스터 지정 절차와 지원 방식, 인력양성, 특별회계 운용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겼다.
특히 클러스터 지정 과정에서 비수도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클러스터에 필요한 산업기반시설의 조성·운영 비용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총사업비의 50~100% 범위에서 부담할 수 있도록 했다. 전력·용수 이중화 시설이나 공급망 안정, 산업안전에 기여하는 시설 등은 전액 지원도 가능하도록 했다.
비수도권 기업과 지역 전문인력의 취업 연계와 재교육 지원을 우선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시행령에 포함됐다. 그동안 반도체 투자의 핵심이 기업의 생산시설을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에 있었다면 특별법은 이제 국가가 클러스터의 기반시설과 인력양성까지 함께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만든 셈이다. 정부가 곧바로 호남 클러스터에 속도를 내는 것도 이런 제도 변화와 맞물려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행보에서 드러나듯 반도체특별법 시행은 반도체 클러스터 정책을 국가 차원의 지원체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11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관련해 2029년 반도체 팹 1차 완공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광주 군공항 이전과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병행해 사업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정부 계획에 따르면 광주 군공항 부지를 활용해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고, 군공항 이전과 산업단지 조성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식으로 사업 속도를 높인다. 국방부 역시 광주 군공항 기능을 2028년 중순까지 다른 군공항으로 임시 배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일정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2028년부터 팹 건축에 들어가 2029년 1차 완공, 이후 양산으로 이어지는 일정이 가능해진다. 지금까지의 질문은 비교적 명확하다. 어디에 반도체 공장을 지을 것인지, 얼마나 빨리 지을 것인지다. 정부는 여기에 대한 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 팹 하나로는 부족하다.. 공장 이후 생태계가 관건
기본적으로 반도체는 생산시설 하나만으로 돌아가는 산업이 아니다.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주변에 있어야 하고 공정을 이해하는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기업의 연구개발 수요를 뒷받침해야 한다. 물류와 정주 여건도 함께 갖춰져야 한다.
전력과 용수는 더욱 기본적인 조건이다. 반도체 생산공정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고품질 용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생산시설의 입지만 정한다고 산업단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특별법을 통해 정부가 기반시설 지원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해서 기업과 인력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이미 수도권을 중심으로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생산시설과 소재·장비업체, 대학과 연구기관, 전문인력이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돼 있다. 기존 인프라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이 생태계를 지방에서 단기간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지방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패는 단순히 팹을 얼마나 빨리 짓느냐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기존 수도권 생태계와의 연결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지역 안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일본 구마모토 사례도 이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대만 TSMC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구마모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반도체 거점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일본의 정책은 공장 유치에서 멈추지 않았다. 소재·부품·장비 기업을 끌어들이고 산학 협력을 강화하는 등 공장 주변의 산업 기반을 확대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일본 정부와 구마모토현이 반도체 관련 기업과 연구개발 거점을 추가로 조성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TSMC 공장이라는 핵심 생산시설을 중심으로 관련 기업과 기술, 인력이 모이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 전력·용수는 물론 소부장·인력·R&D 생태계 구축해야
물론 구마모토와 호남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은 이미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과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고 수도권에 관련 생태계가 집중돼 있다. 따라서 호남의 과제는 기존 산업을 단순히 지방으로 옮기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대학에서 반도체 전문인력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기업의 연구개발 수요와 연결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실제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인책도 마련해야 한다. 지역 기업이 단순한 협력업체를 넘어 자체적인 기술과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원하는 것도 과제다.
전력과 용수 문제 역시 단순한 산업단지 기반시설 차원을 넘어 장기적인 공급 계획과 맞물려야 한다. 앞서 대규모 반도체 투자가 진행된 지역에서 전력망 확충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것도 같은 이유다.
결국 지방 반도체 정책의 목표는 수도권 공장을 지방으로 분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팹을 중심으로 기업과 사람, 기술이 모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
반도체특별법 시행과 호남 클러스터 추진은 그 출발점이다. 정부가 부지를 마련하고 기반시설을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문을 열었다면, 이제 기업과 인력, 연구개발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인지가 남았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첫 팹이 2029년 완공된다면 그것은 사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경쟁의 시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팹이 들어선 지역에 얼마나 많은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자리 잡는지, 얼마나 많은 전문인력이 지역에 남는지, 대학과 연구기관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는지가 진짜 성적표가 될 것이다. 반도체 공장을 지방에 짓는 것은 정부가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이 그 지역에 뿌리내리는 것은 기업과 사람, 기술이 함께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