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글로벌 수소 시장의 주도권 다툼이 기술 개발 경쟁 단계를 지나 안정적 공급망 확보라는 새로운 전장에 진입했다. 수소 자체의 생산 기술력뿐 아니라 암모니아와 e-메탄올 등 수소 기반 연료의 운송·저장 인프라, 장기 공급 계약을 아우르는 종합 가치사슬을 누가 먼저 완성하느냐가 향후 국가와 기업의 에너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4일(현지시간) 발표한 'Global Hydrogen Review 2026'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수소 생산과 수요, 정책, 인프라, 무역 및 투자 동향을 종합 분석하며 이같이 진단했다. IEA는 각국의 지원 정책과 적극적인 민간 투자에 힘입어 저탄소 수소 프로젝트의 수 자체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지만 이를 실제로 유통하고 소비처까지 전달할 공급망 구축은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했다.
◆ 숫자로 입증된 공급망 가뭄과 지정학적 리스크
보고서가 제시한 핵심 수치들은 글로벌 수소 산업이 왜 단순 기술 개발을 넘어 공급망 구축이 수소 산업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으로 발표된 저탄소 수소 프로젝트 중 국가 간 무역을 목적으로 한 물량의 40% 이상이 시장 진출을 표방했지만 실제로 최종투자결정이나 착공 단계에 도달한 비중은 8% 미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규 FID 집행 물량 역시 연간 80만 톤 미만에 머무르며 투자 모멘텀이 크게 둔화됐다. 오히려 인프라 부족과 공기 지연, 오프테이크(Off-take·장기 구매 확약) 계약 체결의 불확실성 탓에 잠재 파이프라인 중 약 1,000만 톤 규모의 프로젝트가 공식 취소되거나 잠정 중단됐다.
IEA는 2027년 초까지 신규 투자 결정이 차질을 빚을 경우 약 2,200만 톤 규모의 저탄소 수소 프로젝트가 2030년까지 시장에 진입조차 못 하고 사라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공급망 구축이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분쟁은 글로벌 수소·화학 생태계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중동은 글로벌 암모니아 및 요소 무역의 핵심 거점 역할을 담당해왔으나 분쟁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통과 차질 등으로 글로벌 암모니아 무역의 25% 이상, 요소 무역의 40%가 분쟁 영향권에 놓여 공급망 리스크가 확대됐다.
그 결과 분쟁 이후 국제 요소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상승하며 세계 식량 및 정유·화학 공급망 전체가 흔들렸다. IEA는 수소 시장이 초기 LNG 산업과 유사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기술 경쟁보다 장기 계약과 운송 인프라, 저장시설을 선점한 국가가 시장을 주도했던 LNG처럼 수소 역시 공급망 경쟁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초기 LNG 시장 역시 단순 가스 액화 기술보다 장기 선구매 계약을 기반으로 대형 전용 운반선, 인수 터미널, 재가스화 시설 등의 공급망 인프라를 선점한 국가와 기업이 시장을 지배했다. 수소 역시 저장·운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암모니아나 e-연료(e-fuel) 형태로 변환해 해상 운송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는 만큼 호주, 북미, 남미, 아프리카 등 지정학적 위험이 낮고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신규 거점으로의 공급망 재편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한편 이번 보고서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중국의 가파른 시장 지배력 확대다. 중국은 저탄소 수소 생산의 핵심 장비인 전해조(수전해 설비) 시장을 가공할 만한 속도로 압도하고 있다. 그 증거로 2025년 전 세계 신규 설치 전해조 용량의 약 75%가 중국에 설치됐을 정도다.
현재 중국은 대규모 내수 시장과 정부 지원,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수전해 설비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다. 서방과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수전해 장비 자체의 단가 싸움을 넘어 해상 유통망과 인수 인프라 연계라는 종합 솔루션으로 맞서야 하는 거대한 과제를 안게 됐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 CHPS 가동된 한국과 기업들의 사활
이러한 글로벌 패러다임의 전환은 해외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정책 현장과 대기업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에서는 청정수소발전 입찰시장(CHPS)이 본격 가동되고 탄소배출량에 따라 등급을 부여하는 청정수소 인증제도 시행되면서 제도적 기반이 갖춰지고 있다.
여기에 정부와 지자체가 추진하는 수소항만 인프라 구축 사업이 연계되면서 발전사와 대기업들은 15년 이상의 장기 공급 계약을 전제로 해외 청정수소·암모니아를 얼마나 안정적이고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느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에 발맞춰 국내 주요 대기업들도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 수준을 넘어 해외 생산부터 해상 운송, 국내 인수까지 연결하는 실체적 밸류체인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HD현대를 비롯한 국내 조선업계는 초대형 암모니아 운반선(VLAC)과 액화수소 운반선 기술 개발 및 수주를 확대하며 해상 운송 인프라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포스코그룹 역시 호주 H2 프로젝트 등 해외 대규모 그린수소·암모니아 생산 기지에 직접 지분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향후 수소환원제철에 필요한 청정수소 공급망 확보를 위해 호주 등 해외 프로젝트 투자와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해외 청정 암모니아 생산 프로젝트의 지분 확보부터 해상 운송, 국내 수소·암모니아 혼소 발전소 적용에 이르는 '암모니아 풀 밸류체인'의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SK그룹 또한 북미 등 해외 청정수소 프로젝트에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한편, 국내 인수 터미널과 도시가스 인프라를 연계하는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수소 공급망 확보 경쟁은 단순히 미래 신사업을 둘러싼 대기업 간의 파이 싸움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경제 전체 및 국내 제조업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해외 청정수소 공급망을 얼마나 차질 없이 구축하느냐에 따라 국내 수소 발전단가와 전력 구매 비용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나아가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글로벌 환경 규제 속에서 국내 철강·석유화학·정유 산업의 탈탄소 전환 비용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국내 조선사들의 친환경 선박 수주 경쟁력까지 감안하면 수소 공급망 확보는 단순한 에너지 전환을 넘어 국가 제조업의 근간을 좌우하는 변수로 떠올랐다. 결국 수소경제의 승부는 '누가 먼저 생산하느냐'보다 '누가 먼저 생산과 운송, 저장, 소비를 연결하는 공급망을 완성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IEA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