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로 지방에서는 생산된 전기를 버리는 출력 제어가 일상화되고 있지만 수도권 첨단 산업단지는 대규모 전력 계통 연계 방안을 마련하지 못해 발을 굴리는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발전 설비 증설 속도를 송전망 등 계통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하며 전력 수급의 공간적 불일치가 발생한 결과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장 가동에 막대한 전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전력망 확충 성패가 향후 한국 첨단 산업의 생존을 가르는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 만들어도 버리는 지방의 전기, 전력이 없어 발만 굴리는 수도권
전기는 생산과 동시에 소비되지 않으면 전력망 전체가 마비되는 특성을 가진다. 전력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 전압과 주파수가 흔들려 계통 안정성을 위협하고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실시간으로 맞추는 능력이 전력 관리의 핵심인 이유다.
문제는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가 특정 지역에 편중되면서 이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 태양광과 풍력 발전이 급증한 호남·해안 지역에서는 한낮에 전기가 과도하게 남는 상황이 빈번해졌다. 그러나 생산된 전기를 수요가 쏠린 수도권으로 즉시 보낼 송전망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전력거래소는 계통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발전 출력 제어를 시행하고 있다.
실제로 발전 현장의 출력 제어 규모는 수치로 증명된다. 3일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전력거래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호남권 재생에너지 출력제어량은 8만3944MWh(171회)에 달했다. 2021년 35MWh(3회)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5년 만에 2398배 급증한 규모다. 전력 생산 능력이 늘어나도 이를 전달할 전력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버려지는 전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문제는 지방에서 출력 제어가 이뤄지는 동안 한국 산업의 핵심 거점인 수도권에서는 첨단 산업단지에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끌어올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계획 기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첨단 라인 증설에 따라 단계적으로 10GW 이상의 대규모 전력 공급이 필요할 전망이다.
여기에 애플,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 고객사들이 국내 반도체·부품 공급망을 대상으로 RE100(사용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 이행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을 더한다. 국내 기업들로서는 막대한 전력의 절대량을 확보하는 동시에 지방에서 생산된 친환경 전력까지 제때 공급받아야 하는 복합 과제에 직면한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의 입지 전략도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 공장이나 데이터센터를 지을 때 부지 가격, 교통, 인력 수급이 최우선 고려 요소였다면 이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계통 연계가 가능한가’가 입지를 결정하는 핵심 투자 판단 기준으로 부상했다. 수도권 규제를 피해 지방 이전을 검토하는 데이터센터 업체들조차 지방 역시 전력망 불안정과 계통 접속 한계로 인해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쉽지 않다고 토로하는 이유다.
◆ "발전소는 3년, 송전선은 10년" 전력 안보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구조적 과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방 생산-수도권 소비의 공간적 불균형과 전력망 확충의 시간적 시차를 짚는다. 지방에서 생산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 첨단 산업단지로 차질 없이 보내려면 초고압 직류송전(HVDC) 등 핵심 송전선로 신설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주요 송전망 프로젝트들은 주민 수용성 문제, 지자체 인허가 갈등, 그리고 한국전력의 재무적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당초 계획보다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전력업계 한 관계자는 "발전소를 짓는 데는 3~5년이면 충분하지만 송전선로를 신설하는 데는 주민 합의와 인허가 문제로 10년 이상이 걸린다"며 "이 시간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계통 병목 현상이 첨단 산업 단지의 적기 전력 공급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전력망 확충 책임을 한전이라는 단일 공기업의 재무 상태와 사업 수행 능력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한전의 재무 여건이 악화되면서 선제적인 인프라 투자가 제속도를 내기 어려워졌고 이는 국가 차원의 첨단 산업 지원 역량과도 직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직접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고 보상체계를 현실화하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제정과 함께 전력 수요 자체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지역별 차등 요금제 등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처럼 전력망 확충과 계통 안정이 국가적 과제로 떠오름에 따라 관련 인프라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에는 새로운 시장 기회가 열리고 있다. 초고압 변압기와 HVDC,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에서 기술력을 갖춘 LS일렉트릭, 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등 전력 기기 주요 기업들은 국내외 전력망 고도화 및 투자 확대에 힘입어 실적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전력망 구축이 단순한 토목·건설을 넘어 국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고부가가치 첨단 인프라 산업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탄소중립과 AI 혁명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 에너지 안보의 기준도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원유와 LNG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능력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생산된 전기를 필요한 곳에 얼마나 빠르게 연결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