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일본 최대 발전회사인 JERA가 오는 10월까지 사용할 액화천연가스(LNG) 물량을 모두 확보했다고 31일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여름철 기록적인 폭염과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동시에 몰아치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일본이 한발 앞선 선제적 연료 비축을 통해 전력 공급에 차질이 없을 것임을 대외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유사한 입장에 놓인 한국으로서는 부러움과 함께 긴장감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소식이다. LNG 수입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 역시 연료 확보의 성패가 올여름 전력 수급은 물론 다가올 겨울철 난방 대비, 나아가 전기·가스요금과 국가 산업 경쟁력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로이터가 전한 일본의 빠른 움직임은 당장 올여름과 다가올 겨울을 맞아야 하는 한국 에너지 안보에 직접적인 경고등을 켜고 있다.
◆ "돈 있어도 못 사" 폭염·중동 리스크에 AI 전력 폭발까지
현재 글로벌 LNG 시장은 다중 리스크가 동시에 몰아치는 불확실성의 극단에 서 있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인한 호르무즈 해협 운항 리스크와 카타르발 공급망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럽의 조기 겨울 연료 비축 경쟁과 아시아 지역의 기습적인 폭염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시설 증설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LNG 확보 경쟁은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익히 아는 것처럼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산업시설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상시 소비한다. 무엇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미국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면서 전력 확보 경쟁은 국가 간 산업 경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전력 생산에 필요한 LNG 확보 경쟁 역시 과거보다 훨씬 치열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러한 수급 불균형 상황에서는 현물 가격이 단기 폭등할 뿐만 아니라 자칫 타이밍을 놓칠 경우 돈을 주고도 제때 LNG를 구하지 못하는 물량 차질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본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선제적 확보가 가능했을까.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LNG 의존도가 크게 높아지면서 세계 최대 수준의 LNG 트레이딩 역량을 구축해 왔다. JERA 역시 단순한 발전회사가 아니라 글로벌 LNG 거래와 선박 운용, 장기계약 포트폴리오를 동시에 운영하는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했다. 업계에서는 싱가포르 트레이딩 자회사를 통한 유연물량 확보 등 이 같은 민간 중심의 조달 역량이 이번 선제적 확보를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보고 있다.
한국 역시 이런 불확실성을 타파하기 위해 다걱적인 대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준은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렇다면 한국은 실제 얼마나 비축하고 있으며, 현재 준비 상황은 어떨까.
한국은 연간 약 4,500만~5,000만 톤 규모의 LNG를 들여오는 세계 3위권의 대표적 LNG 소비국이다. 국내 발전 전력량의 약 25~30%를 LNG가 담당하고 있으며 도시가스 공급까지 감안하면 국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 축이라 불러도 무방한 상황. 더 우려되는 점은 천연가스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만큼 국제 가격과 공급망 변화에 매우 민감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 가격과 공급망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만큼 안정적인 재고 확보와 추가 물량 조달 능력이 에너지 안보의 핵심 변수로 꼽히는 이유다. 이런 이유로 국내 LNG 수급은 한국가스공사를 중심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정부도 계절별 수요 변화에 맞춰 재고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정부는 여름철 폭염과 겨울철 한파에 대비해 발전용·도시가스용 LNG 재고를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도록 관리하고 있지만 최근처럼 국제 LNG 시장 변동성이 커지는 시기에는 재고 규모뿐 아니라 얼마나 신속하게 추가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단순한 비축량보다 장기계약과 현물 구매의 적절한 조합, 해외 트레이딩 네트워크 확보 여부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한다.
따라서 JERA의 이번 발표는 이러한 변화가 이미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에너지 시장에서는 '필요할 때 사면 된다'는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같은 LNG 시장에서 물량을 확보해야 하는 한국 역시 폭염과 국제 가격 변동성이 겹칠수록 연료 조달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 연료 확보 경쟁의 파장. 전기요금부터 조선업까지 흔든다
또한 LNG 확보 여부와 국제 가격 변동은 국내 에너지·발전 기업의 실적은 물론 국가 경제 전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가장 먼저 부담을 떠안는 곳은 공기업이다. 한국가스공사는 안정적인 재고일수를 유지하면서 고가 현물 구매 비중을 최소화해야 미수금 증가를 억제할 수 있다. 한국전력 역시 국제 가스 가격이 오르면 전력구입비가 상승해 발전원가 부담이 커지고 이는 누적 적자를 더욱 키워 전기요금 인상 압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반면 민간 에너지 기업들은 보다 유연한 조달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과 SK E&S, GS EPS 등 민간 발전·트레이딩 기업들은 자체 직수입 채널과 해외 가스전 자산을 기반으로 조달 비용을 낮추는 한편, 글로벌 LNG 거래를 통해 수익성을 높이는 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국제 시장의 변동성이 이들에게는 위험인 동시에 새로운 사업 기회가 되는 셈이다.
다만 LNG 가격의 영향은 기업들의 실적에서 끝나지 않는다. 국제 LNG 가격이 상승하면 산업용 에너지 비용이 높아지고 제조원가를 끌어올려 식품 생산비와 외식 물가 등 생활물가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본 JERA의 선제적 LNG 확보가 국내 소비자에게도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한편 글로벌 LNG 확보 경쟁은 국내 조선업계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과 카타르를 중심으로 LNG 수출 프로젝트가 확대되고 각국이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에 나설수록 LNG 운반선(LNGC)과 부유식 저장·재기화 설비 발주도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국내 조선 3사의 고부가가치 선박 수주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키우고 있다.
결국 이번 JERA의 발표는 단순한 기업 차원의 연료 확보 소식을 넘어 에너지 안보의 기준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얼마나 저렴한 가격에 LNG를 확보하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물량을 제때 확보할 수 있는 조달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한국 역시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해 비축 확대와 함께 장기계약과 현물 조달의 균형, 민간과 공공을 아우르는 LNG 조달 체계 전반을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에너지를 확보하는 능력이 곧 산업 경쟁력과 국민 경제를 지키는 방패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