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수소경제 빈칸 채운다.. 액체수소 저장·하역 기술 첫 국산화

생산 넘어 저장·운송으로.. 국내 첫 인수기지 핵심기술 개발사업 착수
LNG 터미널 잇는 차세대 에너지허브.. 장기 에너지 저장 수단으로도 주목

 

[엔트로피타임즈 김재영 기자] 국내 수소산업이 생산 중심에서 저장·운송 등 공급망 구축으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부와 산업계의 수소 정책이 그린·블루수소 생산 인프라 조성이나 수소차·연료전지 등 활용 부문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생산된 수소를 어떻게 들여오고 저장하며 발전소와 대형 산업단지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연결고리 구축이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국내 수소 공급망 완성의 첫 단추가 될 '액체수소 인수기지' 핵심 기술 국산화 사업이 지난 27일, 강원도 삼척에서 첫발을 뗐다. 단순한 지자체의 인프라 유치나 지역 건설 사업을 넘어 해외 의존도가 높았던 극저온 에너지 기자재 산업의 자립과 글로벌 플랜트 시장 선점을 위한 중요한 산업적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기체에서 액체로.. 수소 유통의 판도와 경제성이 바뀐다
수소는 상온에서 기체 상태일 때 부피가 매우 커 대량 운송과 저장에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기존 기체수소 인프라는 고압 튜브트레일러를 활용하더라도 1회 운송 용량이 수백 kg 수준에 불과해 운송 단가가 비싸고 지역 단위 버스나 충전소 공급 등 중소규모 수송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수소를 마이너스 253도의 극저온으로 냉각해 액화하면 부피가 약 800분의 1로 줄어든다. 동일한 용기의 공간에 800배 많은 수소를 저장할 수 있어 한 번에 대량으로 운송할 수 있는 유통 혁신이 가능해진다.

 

과거 LNG(액화천연가스) 도입이 국내 천연가스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액체수소 인수기지는 향후 해외에서 수입되거나 해상에서 생산된 수소를 대규모로 받아들이는 미래 수소 항만 역할을 하게 된다.

 

LNG 터미널이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에너지 인프라의 뼈대를 세웠듯 이제는 대규모 수소혼소 발전소나 화학·철강 산업단지에 대량의 수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액체수소 터미널로의 산업적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조금은 늦은 감이 없지는 않다. 이미 독일, 미국, 일본 등 수소 선진국들은 2010년대 후반부터 액체수소 인수 및 유통 인프라 상업화에 박차를 가해왔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최근 SK, HD현대, 효성 등 주요 대기업 그룹사들이 액체수소 플랜트 건설과 수소 운반선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으나 이를 받아줄 하역 및 저장 인수기지 기술의 상당 부분은 해외 엔지니어링 기업에 의존할 위험이 존재했다. 이번 사업은 이 같은 해외 기술 의존성을 끊어내기 위한 첫 시도다.

 

이번 사업의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단순한 인수기지 건설이 아닌 핵심 설비와 부품의 국산화다. 액체수소를 다루기 위해서는 마이너스 253도라는 극한의 환경을 견디는 ▲극저온 저장탱크 ▲선박과 기지를 연결하는 로딩암(Loading Arm) ▲극저온 전용 배관 및 밸브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는 초고난도 단열 및 재료 공학 기술이 요구되어 해외 진입장벽이 매우 높았던 미개척 분야다.

 

국내 기업들과 연구진이 주도하는 이번 기술 개발이 성공할 경우 단순 설비 도입을 넘어 국내 기자재 업체들의 기술 격차 해소와 EPC(설계·조달·시공) 경쟁력 강화로 직결된다. 나아가 향후 폭발적으로 성장할 글로벌 액체수소 플랜트 시장 진출을 위한 강력한 실증 트랙레코드를 확보하게 된다.

 

한편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시설 확대로 전력 수요가 늘면서 장기 에너지 저장 기술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발생하는 잉여 전력을 장기간 저장·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검토되는 가운데 액체수소 역시 유력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대규모 저장과 장거리 운송이 가능하다는 특성 덕분에 산업용 연료와 발전용 에너지원은 물론 향후 수소 공급망의 핵심 저장 매체로 활용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산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국내 수소 생태계에서 생산과 활용 사이에 위치한 저장·하역 등 유통 인프라는 비어있는 빈칸과 같았다"며 "이번 인수기지 국산화 기술 개발은 국내 수소 산업이 단순 구상과 비전 발표를 넘어 핵심 기자재 국산화를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상업화 및 수출 산업화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