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일본이 전후 수십 년간 지켜온 평화국가의 틀을 서서히 벗어나 방산 수출국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영국·이탈리아와 함께 추진 중인 차세대 전투기 공동개발 사업에 캐나다가 첫 옵서버로 합류하면서 일본은 더 이상 무기 산업의 주변부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 방산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감을 키우려 하고 있다.
단순한 전투기 제작을 넘어 AI·드론·첨단 반도체가 집약된 6세대 무기체계 개발에 참여하는 이런 모습은 일본이 안보 정책뿐 아니라 산업 전략과 외교 전략까지 재편하려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방산 시장에도 직접적인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여진다.
◆ 전투기보다 큰 일본의 승부수.. 방산으로 미래 설계 나서
21일(현지시간) 영국 판버러 국제에어쇼 현장에 마련된 대형 회의실. 일본,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등 4개국 국방장관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영국·이탈리아 3국은 캐나다를 차세대 전투기 공동개발 사업인 ‘글로벌 전투 항공 프로그램(Global Combat Air Programme· 이하 GCAP)’의 첫 옵서버(참관국) 국가로 공식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2022년 12월 3국 협력체로 출범한 GCAP가 외부 우호국으로 범위를 넓힌 첫 번째 사례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와 일본 요미우리신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표면적으로는 참관국이 하나 늘어난 소식에 불과해 보이지만 글로벌 방위산업계는 이번 결정을 일본 방위산업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랫동안 무기는 만들되 팔지는 않는 나라였던 일본이 이제는 다국적 안보 연대와 첨단 방산 개발의 주도적 축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GCAP가 단순한 전투기 개발 사업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는 차세대 무기체계와 첨단 산업 생태계를 동시에 구축하는 성격을 지니며 일본의 전략적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 구체적 목표는 일본 방위성의 F-2 전투기와 영국·이탈리아 공군의 유로파이터 타이푼을 대체할 차세대 플랫폼을 마련하는 것이다. GCAP는 오는 2035년 실전 배치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단순한 기체 교체를 넘어 미래 전장 환경을 선도하려는 야심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영국의 BAE 시스템스,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등 각국을 대표하는 방산 대기업이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반 자율 교전 체계, 다수의 무인기(드론)를 동시에 통제하는 유·무인 복합체계(MUM-T), 초고속 데이터 링크와 차세대 센서 네트워크를 결합한 하늘 위의 지휘통제소가 핵심이다. 이는 단순히 스텔스 성능을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미래 전장 전체를 재편할 수 있는 기술 집약체로 평가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GCAP는 기술 개발을 넘어 국제적 협력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캐나다의 참여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로이터 통신은 “방위비 분담 부담 없이 기밀 정보 교류와 장래 도입 타당성을 타진하려는 캐나다의 참여는 미 무기 체계 중심이던 캐나다의 전략적 다변화 셈법과 GCAP 측의 수출 저변 확대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즉, 미국산 무기에 크게 의존해온 캐나다가 새로운 선택지를 모색하는 동시에, 일본은 국제 방산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 K-방산과의 경쟁·협력, 동아시아 시장 판도 흔들릴 수도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본이 다국적 첨단 전투기 사업을 주도하고 제3국을 끌어들이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전후 일본은 평화헌법 정신에 기반한 ‘무기수출 3원칙’에 묶여 방위산업을 철저히 자국 자위대 수요에만 의존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부품·제조 기술을 보유하고도 해외 시장에서는 전무한 존재감에 머물렀고 방산은 국가 성장 동력이 아닌 비용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력 증강,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겹치면서 일본은 안보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됐다. 아사히신문이 “급변한 동아시아 안보 환경과 미·일 동맹의 동등한 파트너십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박이 일본의 방산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고 평가한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일본은 2014년 아베 내각 시절 ‘방위장비 이전 3원칙’을 제정하며 해외 수출의 길을 터주었고 최근에는 GCAP와 같은 국제 공동개발 무기의 제3국 수출까지 공식 허용하는 등 법적·제도적 빗장을 완전히 풀었다.
내수용 무기 생산에만 매몰돼 있던 미쓰비시중공업, IHI, NEC 등 일본 기술기업들이 글로벌 방산 시장의 전면에 등판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방산을 단순한 안보 비용이 아닌 첨단 산업 투자로 인식하며 장기 침체를 겪은 제조업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불어넣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팽창은 한국 방위산업에도 적지 않은 긴장감을 고취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한국 방산은 KF-21, FA-50, K-9 자주포 등을 앞세워 가성비와 신속한 납기, 뛰어난 운용 효율성을 무기로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떠오르는 신흥 강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일본은 수십 년간 축적한 첨단 소재, 항공전자, AI 기술을 무기로 유럽과의 전략적 블록을 형성하며 다자간 공동개발이라는 고위급 기술연대 트랙을 밟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글로벌 안보 지형이 미·중 패권 갈등과 블록화로 개편되는 상황에서 일본은 GCAP를 매개로 인도·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방산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제 방산 컨설팅업체 관계자는 “한국이 단독·주도형 무기 체계 수출로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면 일본은 거대 다국적 프로젝트를 통해 글로벌 표준을 선점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며 “향후 6세대 전투기 시대로 접어드는 20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양국의 방산 전략이 세계 시장에서 직접 충돌하거나 새로운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전망은 단순한 전문가의 분석을 넘어 일본이 무기를 만들되 팔지 않던 나라에서 국제 방산 질서의 핵심 축으로 변모하려는 흐름을 보여준다. GCAP 참여 확대는 일본의 전략적 변화를 상징하는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방산 시장의 경쟁 구도를 새롭게 짜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 결국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일본의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현실화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 어떤 경쟁·협력 관계를 만들어갈지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