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탄소중립 시계가 대폭 빨라진다. 정부가 그간 완성차 업계의 자율적 감축에 의존해 오던 덤프트럭과 대형 트랙터 등 중·대형 상용차에 사상 처음으로 법적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하기로 했다.
동시에 일반 승용차의 배출 기준도 기습적으로 대폭 강화했다. 이번 조치는 미·유럽 등 주요국의 기후 규제 정책이 극단적으로 갈라지는 가운데 발표된 것으로 우리 완성차 및 부품 업계에 정부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올해 초 온실가스 규제 근간을 폐기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완화 행보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국내 완성차 업계가 강화된 안방 규제를 피하면서 해외 무역장벽이라는 과제까지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 수소내연차 슈퍼크레딧 등 한국형 유연성 제도로 돌파구 모색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발표한 개정안의 핵심은 그간 규제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중·대형 상용차의 단계적 의무 감축 전환이다. 차량 총중량 3.5톤 이상의 상용차는 승용차보다 대당 배출량이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연비 개선 기술 적용과 수소·전기차 개발 기간을 고려해 그간 강제 규제에서 비껴가 있었다.
그러나 오는 2027년부터는 기준년도인 2021~2022년 평균치 대비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30% 감축해야 하는 법적 의무를 지게 된다. 정부는 업계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차종별로 감축 시기를 3단계로 나누어 적용할 방침이다.
먼저 2027년부터는 가장 덩치가 큰 15톤 이상의 대형 화물차와 트랙터가 첫 타자로 의무화 대상에 오른다. 이어 2028년에는 중·대형 승합차로 범위가 넓어지며, 2029년부터는 15톤 미만의 중형 화물차와 덤프트럭까지 규제 대상에 전면 편입된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제조사에는 엄격한 과징금이 매겨진다. 도입 초기인 2027년에는 온실가스 배출단위당 50만 원 수준의 비교적 낮은 요율로 출발하지만 규제가 전면 시행되는 2031년 이후에는 220만 원까지 요율이 단계적으로 크게 오른다.
현재 국내 대형 상용차 시장을 견인하는 현대자동차와 타타대우상용차 등은 2027년이 오기 전에 대형 화물 및 트랙터 분야의 전동화 라인업을 완전히 구축해야 하는 급박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미 온실가스 규제를 적용받고 있던 일반 승용차와 소형 화물차 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정부가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하는 친환경 커트라인을 기존 예고치보다 훨씬 까다롭게 고쳤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규제는 차량이 달릴 때 뿜어내는 탄소의 '최대 허용량'을 정해두는 방식이어서, 허용량 수치가 낮아질수록 자동차 회사 입장에서는 규제가 강해진다.
당초 정부가 예고했던 2030년 승용차(10인 이하 승합차 포함)의 1km당 탄소 배출 허용량은 70g이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은 이 허용 기준을 54g으로 뚝 떨어뜨리며 규제의 강도를 22.8%나 높였다. 1톤 트럭이나 승합차(11~15인승)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원래는 2030년까지 1km당 탄소를 146g까지만 뿜도록 차를 만들면 규제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98g 이하로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만 하는 엄격한 문턱을 마주하게 되었다.
◆ 美 트럼프 2기 규제 폐기 흐름과 정반대 눈길
이번 조치가 눈길을 끄는 것은 글로벌 주요 시장의 흐름과 엇박자를 낸다는 점이다. 지난 2026년 2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정부 시절부터 미국 친환경 규제의 뼈대를 이루던 '온실가스 위해성 판단' 규정을 전격 폐기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 연방 정부 차원의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와 전기차 의무화가 멈춰 섰음을 뜻한다.
한국 정부가 이번 고시의 참고 지표로 삼은 미국의 2030년 기준 역시 이미 미 연방 정부에서는 사실상 효력을 상실한 과거의 유물이 된 셈이다.결국 미국 시장은 규제 빗장이 풀려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차량 중심으로 회귀하는 반면, 국내 시장은 유럽연합(EU) 수준에 육박하는 강력한 탄소 규제 장벽이 새로 세워지는 '정책 탈동조화(디커플링)'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수출용 차량과 내수용 차량의 친환경 사양을 완전히 이원화하여 기획·생산해야 하므로, 불필요한 라인 중복과 생산 단가 상승 등 비효율이 크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정부 역시 이러한 업계의 깊은 우려를 의식해 단순 규제에 그치지 않고 제도의 연착륙을 돕기 위한 현실적인 우회로와 인센티브 제도를 개정안에 대거 녹여냈다.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수소내연기관(HICE) 차량에 대한 슈퍼크레딧 혜택의 최초 신설이다.
슈퍼크레딧은 친환경차 판매 실적을 가중치로 인정해 제조사의 평균 배출량 성적을 낮춰주는 일종의 보너스 점수다. 고가의 배터리나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대신 기존 내연기관 엔진을 유연하게 개조해 수소를 연소시키는 수소내연기관 기술은 최근 상용차 전동화의 현실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인센티브 신설로 관련 독보적인 엔진 기술력을 갖춘 현대차와 HD현대인프라코어 등 국내 기계·부품 업계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소형차 분야에서 올해 말 사라질 예정이었던 하이브리드 및 전기·수소차의 슈퍼크레딧 일몰 기한도 2029년까지로 길게 연장되었다.
또한 국내 제조업의 저탄소 기조를 확산하기 위해 RE100과 연계한 '간접감축 제도'를 국내 최초로 시범 적용한다. 이는 자동차 제조사가 국내 생산 공장에서 신재생에너지를 직접 생산하거나 사용했을 경우, 당해 연도 차량 배출가스 성적의 최대 5%까지 감면 혜택을 주는 획기적인 방식이다. 공장 자체를 친환경화하면 차량의 탄소 배출 규제를 일부 면제해 주는 유기적인 정책 설계로 주요 제조 공장들의 친환경 설비 투자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겠다는 포석이다.
대기업과 중소·중견 기업 간의 규제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세심한 안전장치도 마련되었다. 기존에는 연간 판매량이 4,501대만 넘으면 글로벌 대기업과 동일한 잣대로 규제를 적용받았지만, 이번 개정으로 연간 5만 대 이하를 판매하는 중규모 제작사 구간이 새로 만들어졌다.
이들에게는 대기업 기준보다 약 7~9.8% 완화된 기준이 적용되어 중견 완성차 브랜드나 수입차 업계가 급격한 과징금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배려했다. 아울러 초과 달성한 탄소 크레딧의 이월 및 미달성분의 상환 기간 역시 최대 5년으로 늘어난다.
기후에너지환경부 김진식 대기환경국장은 “수송 부문의 온실가스 감축 제도는 우리 자동차 산업이 대전환기 속에서 미래 글로벌 경쟁력을 선제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업계의 적극적인 전환 투자를 당부했다. 정부는 오는 9월 14일까지 약 60일 동안 자동차 업계와 시민사회, 학계의 의견을 촘촘히 수렴해 이번 고시 개정안을 최종 확정하여 공포할 계획이다.
업계 전문가는 "이번 개정안은 친환경 무역 장벽을 쌓아 올리는 유럽과 화석연료 회귀 노선을 걷는 미국 사이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이 마주한 샌드위치 신세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며 "수소내연기관 우대나 공장 RE100 연계 감축 등은 현장의 고심을 적극 반영한 대목이지만, 과징금 압박이 제조사의 숨통을 먼저 죄지 않도록 친환경 인프라 확충과 전환 지원책이 궤를 같이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