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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 과징금 부과한 공정위 '원재료 카르텔' 정조준

전분당 4사에 역대 최대 7476억 과징금.. 시장 경쟁 회복 겨냥
설탕·밀가루 이어 기초 원재료 시장 전방위 점검 나선다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설탕과 밀가루에 이어 이번에는 전분당이다. 국민 식탁과 제조업의 기초가 되는 원재료 시장을 겨냥한 공정거래위원회의 대형 담합 제재가 잇따르면서 산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과점 구조 속에서 소수 기업들이 가격을 주도해온 원재료 시장에 공정위가 잇달아 칼을 빼 들면서 오랫동안 굳어져 온 가격 질서에도 변화가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이번 전분당 담합 사건 적발은 특정 업계의 불공정 행위를 확인한 데 그치지 않고 설탕·밀가루·제지 등 생활과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기초 원재료 시장의 경쟁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전분당 7년5개월 가격담합 적발..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 강수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8일 세종정부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대상, 사조씨피케이, 삼양사, CJ제일제당 등 국내 주요 전분·전분당 제조업체 4곳이 2018년 5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7년 5개월 동안 판매가격을 담합한 사실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이들 업체에 총 7,476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담합으로 왜곡된 시장 경쟁을 회복하기 위해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도 함께 내렸다. 담합 사건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의 과징금이자 공정위가 시장 구조의 정상화까지 겨냥한 강도 높은 제재라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중들의 눈길을 끈 건 역시 역대 최고 규모의 과징금 부과겠지만 그보다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은 담합 이전 수준으로 가격 경쟁을 회복하도록 ‘독자적 가격 재결정 명령’을 내렸다는 점이다.

 

이는 기업들이 경쟁 상황에서 가격을 다시 책정하도록 요구하는 조치로 공정위가 극히 제한적으로 활용해온 제재 수단이다. 전분당 시장이 20년 넘게 과점 체제를 유지해왔고 담합 관행이 장기간 이어진 만큼 단순한 과징금만으로는 경쟁 질서를 회복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공정위의 의지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공정위는 “전분당 시장은 국민 생활과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기초 원재료 시장으로 장기간 담합이 이어진 만큼 단순한 과징금만으로는 경쟁 질서 회복이 어렵다”며 강력한 제재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한 시기에도 담합 구조가 유지됐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업들이 원가 상승은 빠르게 반영하면서 원가 하락은 늦추는 방식으로 소비자와 수요기업에 부담을 전가했다고 밝혔다.

 

발표 직후 업계와 학계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전분당은 음료, 과자, 빵, 아이스크림 등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원료이기 때문에 가격 담합은 곧 소비자 물가에 직결된다”며 “이번 조치는 업계 전반에 경각심을 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지업계 관계자 역시 “골판지와 백상지 등 제지산업에서도 전분당은 필수 원료인데 가격 담합이 장기간 이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라며 “공정위의 조치가 다른 산업에도 경고로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학계에서도 분석이 이어졌다. 경제학자들은 “설탕, 밀가루, 인쇄용지에 이어 전분당까지 연쇄적으로 제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정위가 원재료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겨냥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법학 전문가들은 “과점 구조 자체는 위법이 아니지만 시장지배력이 가격 공동행위로 이어질 경우 소비자 피해가 커진다”며 “이번처럼 대규모 과징금과 강도 높은 시정명령이 내려지면 비슷한 구조를 가진 업계 전반에도 상당한 경각심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국제 곡물 시장과의 연계성도 주목된다. 전분당의 주요 원료인 옥수수는 국제 가격 변동에 민감한 품목이다. 담합 구조가 유지될 경우 국제 가격 상승은 곧바로 국내 원재료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지만 하락은 늦게 반영돼 소비자 가격에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국내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수출 경쟁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이번 공정위의 조치는 국내 시장을 넘어 국제 경쟁 환경에서도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 식품·제지·철강 등 산업 전반 파장 "다른 과점시장도 긴장"
그간 이런 식의 담합이 다양한 산업계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왔다는 세간의 의심이 적지 않았다. 단순한 의심 수준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제재가 없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치밀했다는 것에 이르면 갈수록 국민들의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공정위 조사 결과 담합이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이 확인됐다. 공정위에 따르면 국제 옥수수 가격이 오르면 업체들은 인상 폭과 시기를 사전에 맞췄고, 반대로 원료 가격이 떨어질 때는 인하 폭을 최소화하며 시점을 늦추기로 합의했다는 것.

 

 

또한 거래처에 전달할 인상 사유와 공문 발송 일정, 적용 날짜까지 조율했고 서로 상대 회사의 공문 발송 여부를 확인하며 공동 대응했다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이다. 그 결과 담합 기간 동안 판매가격은 최대 73%까지 인상됐다.

 

문제는 이러한 담합이 단순히 기업 간 거래에 그치지 않고 국민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담합 대상이 된 전분당은 소비자가 직접 구매하는 제품은 아니지만 음료의 과당, 과자의 물엿, 빵과 제과류, 아이스크림, 맥주, 소스류 등 대부분의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핵심 원료다.

 

그리고 그 영향은 식품업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분당은 제지·철강·건축자재 등 제조업에서도 폭넓게 쓰이며 산업 전반의 원가 구조를 좌우하는 기초 소재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분당 시장에서 경쟁이 제한되면 소비자 물가와 산업 경쟁력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점 구조 자체는 위법이 아니지만 시장지배력이 가격 공동행위로 이어질 경우 소비자 피해가 커진다”며 “이번처럼 대규모 과징금과 강도 높은 시정명령이 내려지면 비슷한 구조를 가진 업계 전반에도 상당한 경각심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가히 산업계 전체에 경종을 울릴만한 이번 공정위의 결정은 앞으로 공정위가 단순히 담합을 적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장 구조 자체를 정상화하려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번 조치가 곧바로 식품 가격 인하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식품 가격은 원재료 외에도 인건비, 물류비, 포장재, 에너지 비용, 환율 등 다양한 요인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인상된 소비자 가격이 단기간 내 내려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원재료 가격이 안정돼도 실제 제품 가격에 반영되기까지 최소 6개월 이상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원재료 시장에서 경쟁이 회복되면 식품회사와 제조업체의 협상력이 높아지고 가격 인상 압력도 완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은 기업 네 곳을 제재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설탕, 밀가루, 전분당처럼 국민 생활과 밀접한 기초 원재료 시장에서 가격 결정 방식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 다른 과점 산업 역시 기존 영업 관행을 점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시멘트 산업에서는 소수 기업이 국내 공급을 장기간 지배하며 가격을 좌우해왔고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특정 제품군은 몇몇 대기업이 시장을 나눠 갖는 구조가 고착화돼 있다. 철강 산업 역시 글로벌 경기와 원재료 가격 변동에 따라 가격을 조정하지만, 국내에서는 소수 기업이 시장을 사실상 통제하는 구조가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분당 사건은 특정 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산업에도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담합이라는 불공정 행위가 더 이상 묵인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가 원재료 시장 전반에 울려 퍼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공정위가 원재료 시장을 시작으로 시멘트, 석유화학, 철강 등 다른 과점 산업에도 조사 범위를 확대할 경우, 국내 산업 전반의 가격 결정 방식에 큰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결국 이번 사건의 성패는 역대 최대 과징금이라는 기록이 아니라 시장에 실질적인 가격 경쟁이 되살아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공정위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원재료 시장에서는 오랫동안 그래왔던 방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가격 공동행위가 용인되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는 시장 구조 자체를 바로잡아 소비자와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회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