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한국, 미국, 일본이 소형모듈원전(SMR)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기로 하면서 차세대 원전 시장을 둘러싼 새로운 동맹이 출범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7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 계기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미국의 루비오 국무장관, 일본의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과 함께 ‘소형모듈원자로(SMR) 배치 협력각서(MOC)’에 서명했다.
이번 협력각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시작으로 제3국에 SMR을 공동 도입·수출하기 위한 협력 체제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표준 노형 개발과 간소화된 계약 절차, 자금 조달, 기자재·연료·서비스 지원 등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담고 있다.
미국 국무부 발표에 따르면 이번 합의는 프로젝트 개발 위험을 줄이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며 민간 투자 촉진과 인허가 절차 간소화, 공급망 최적화를 통해 SMR 상용화를 앞당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은 원천기술과 설계 역량을, 한국은 대규모 원전 건설 경험과 가격 경쟁력을, 일본은 원전 기자재와 핵연료 기술을 각각 보유하고 있어 3국의 역량이 상호보완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3국은 협력 대상국들이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를 충족하는 동시에 핵안전·핵안보·비확산 기준을 준수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산업 협력을 넘어 에너지 안보와 외교적 결속을 강화하는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 SMR의 산업적 가치와 한국의 기회
SMR은 기존 대형 원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건설 기간이 짧아 신흥국이나 산업단지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의 확산과 탄소중립 정책이 맞물리면서 안정적이고 무탄소 전원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빨라지고 있는데, SMR은 이러한 흐름에 가장 적합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 이후 SMR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하며 시장 규모가 수백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IEA는 그 근거로 AI 확산과 전력 수요 증가로 원자력 투자 확대를 꼽았다. 시장의 관측도 대동소이하다. 다수의 시장조사업체들은 2040~2050년 SMR 시장이 수백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낙관적인 시장전망을 지닌 산업이니만큼 이번 협력으로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성장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일단 공동 수출이 현실화되면 한국의 기자재와 시공 역량은 글로벌 시장에서 더 큰 무대를 만나게 되고, 특히 에너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동, 동남아, 동유럽 지역에서 수주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아가 원전 기자재와 부품 공급망에서 한국이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면, 반도체와 배터리에 이어 원전 산업 역시 국가 전략 산업으로 격상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AI 데이터센터와 SMR의 연결성은 산업적 파급 효과를 더욱 크게 만드는 부수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데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간헐성이 크기 때문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어렵다.
반면 SMR은 소규모 단위로 설치가 가능하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해 첨단 산업 인프라에 최적화된 전원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에너지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경제의 성장과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SMR은 지역 경제에도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원전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대규모 고용이 창출되고 기자재·부품 공급망에 중소기업이 참여하면서 산업 생태계가 확장된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할 경우 국내 산업단지와 연구기관에도 새로운 성장 기회가 열릴 수 있다.
◆ 지정학적 의미와 향후 과제는 무엇?
이번 한·미·일 협력은 에너지 산업을 넘어서는 지정학적 의미도 갖는다. 기본적으로 원전은 단순한 전력 공급 수단을 넘어 국가 간 신뢰와 장기적 협력 관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SMR 공동 진출은 동맹국 간 경제적 이해관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에너지 안보를 매개로 한 외교적 결속을 심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가 원전 수출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결국 원전 외교는 에너지와 안보, 경제가 교차하는 전략적 지점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를 형성하는 도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각국의 인허가 절차를 조율하는 문제는 사업 속도를 늦출 수 있고 아직 초기 단계인 SMR의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건설과 운영 비용을 낮추는 기술적 혁신이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SMR의 성공 여부는 결국 경제성 확보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많다. 모듈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해 건설 기간과 비용을 줄이는 것이 핵심이지만 아직 상업적으로 충분히 검증된 사례는 많지 않다. 따라서 이번 협력이 공급망 공동 구축과 표준화를 통해 비용을 얼마나 낮출 수 있을지가 향후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 역시 사회적 수용성과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해법이 요구된다. 게다가 중국과 러시아도 SMR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어 기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이미 부유식 원전 ‘아카데믹 로모노소프’를 운용 중이며, 중국은 하이난성에서 첫 SMR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 캐나다와 유럽연합(EU) 역시 SMR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어 글로벌 경쟁 구도는 다극화되는 양상이다.
향후 구체적인 공동 프로젝트가 성사된다면 SMR은 단순한 차세대 전원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과 외교 전략의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한국이 이 과정에서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원전 산업은 국가 경제와 외교 전략을 동시에 견인하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특히 원전 협력이 나토 회의 계기 합의라는 점은, 에너지 협력이 사실상 안보 협력의 연장선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이 에너지 외교의 새로운 지형에서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 원전 시장은 이제 개별 국가 간 경쟁을 넘어 동맹 단위의 공급망 경쟁으로 재편되는 양상이다. 이번 한·미·일 협력은 한국이 원전 기술 수출국을 넘어 글로벌 원전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