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전 세계 주요국이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청정에너지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환경적 명분을 넘어 재생에너지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영국 정부가 1000억 파운드(약 186조원)에 달하는 청정에너지 분야 민간투자 유치 성과를 공개하며 글로벌 투자 경쟁에 불을 붙였다.
영국 에너지안보·탄소중립부(DESNZ)는 지난 23일(현지시간)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지난해 7월 노동당 정부 출범 이후 현재까지 청정에너지 분야에서 1000억 파운드 이상의 민간 투자가 확보됐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투자 유치가 해상풍력과 태양광, 송전망, 에너지 저장장치(ESS), 수소, 탄소포집·저장(CCUS), 원자력 공급망 등 에너지 전환 전반에 걸쳐 이뤄졌으며, 영국의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견인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발표는 영국에서 열리고 있는 '런던 기후행동주간'에 맞춰 공개됐다. 정부는 청정에너지 투자를 단순한 기후 대응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 확보와 일자리 창출의 핵심 전략으로 제시하며 국제 투자자들에게 영국 시장의 안정성과 성장 가능성을 강조했다.
에드 밀리밴드 영국 에너지안보·탄소중립부 장관은 "청정에너지는 환경정책이 아니라 영국 경제를 다시 성장시키기 위한 핵심 전략"이라며 "해외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는 동시에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국민의 에너지 비용 부담도 낮출 수 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영국 일간 가디언 역시 영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노동당 정부가 재생에너지 확대를 경제성장 전략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정부가 탄소중립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과 '투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향으로 정책 메시지를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 환경보다 경제 더 중요해.. 메시지 바꾼 영국
이번 발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투자 규모보다 정부의 표현 방식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영국 정부는 기후변화 대응과 탄소배출 감축을 정책의 핵심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최근에는 '청정경제', '에너지 안보', '경제성장'이라는 표현이 공식 문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이 에너지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을 겪으면서 에너지 정책의 우선순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중단되자 유럽 각국은 재생에너지 확대를 더 이상 환경정책으로만 볼 수 없게 됐다. 전력을 자국에서 생산하고 해외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대규모 친환경 보조금 정책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청정에너지 산업에 수천억 달러 규모의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를 빨아들이고 있다. 유럽연합 역시 이에 대응해 '넷제로 산업법'과 '청정산업딜' 등을 추진하며 역내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영국 역시 이러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첨단 제조업을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육성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번 1000억 파운드 투자 발표도 단순한 투자 실적 공개가 아니라 영국이 청정산업 투자에 가장 유리한 국가라는 점을 국제 자본시장에 알리기 위한 메시지라는 해석이 나온다.
영국 정부가 공개한 투자 내역을 보면 가장 큰 비중은 해상풍력이다. 영국은 세계 최대 수준의 해상풍력 시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북해를 중심으로 신규 발전단지 조성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태양광 발전과 대규모 배터리 기반 ESS, 노후 송전망 교체, 전력망 디지털화 사업이 함께 추진되고 있다.
특히 송전망 투자는 향후 영국 에너지 정책의 핵심 과제로 꼽힌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산업단지와 대도시로 보내는 송전 인프라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고 전력망 투자를 확대해 병목현상을 해소한다는 계획이다.
◆ 미국·EU·중국까지.. 청정에너지 투자 전쟁
또 하나 주목되는 분야는 배터리와 수소 산업이다. 태양광과 풍력은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만큼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와 수소 생산시설을 함께 구축해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 영국은 이를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보고 관련 민간 투자를 적극 유도하고 있다.
다만 정부가 발표한 1000억 파운드는 이미 모두 집행된 자금이 아니라 정부 출범 이후 발표된 주요 민간 투자 계획과 투자 약속을 합산한 규모라는 점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향후 프로젝트별 최종투자결정(FID)과 시장 상황에 따라 실제 집행 규모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영국 정부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확보하고 프로젝트를 가속화하는 데 이번 발표가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영국 정부가 이번 발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단순히 1000억 파운드를 유치했다는 숫자가 아니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청정에너지 산업이 앞으로 영국 경제를 이끌 핵심 성장동력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청정에너지 확대를 통해 전력 생산 방식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제조업과 금융, 첨단기술 산업까지 동시에 성장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투자 대상을 살펴보면 발전소 건설보다 산업 생태계 구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해상풍력 터빈 제조와 유지·보수, 초고압 송전망 건설, 배터리 저장장치, 수소 생산시설, 탄소포집·저장(CCUS), 원전 공급망 등이 모두 포함됐다. 이는 발전설비 하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관련 기자재와 엔지니어링, 금융, 유지관리 서비스까지 하나의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영국 정부가 특히 공을 들이는 분야는 전력망이다. 재생에너지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생산한 전기를 산업단지와 도시로 보내는 송전망이 부족하면 신규 발전소를 지어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이런 병목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계통 연결 절차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영국 국가에너지시스템운영자(NESO)는 이달 초 700개가 넘는 발전 프로젝트에 새로운 계통 연결을 제안하며 투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정부는 이러한 제도 개혁이 연간 수십억 파운드 규모의 추가 투자를 유도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발표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정책의 일관성이다. 영국 정부는 2030년 청정전력 목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며 정권 교체 이후에도 장기 투자 방향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수십 년간 운영되는 발전소와 송전망 사업에서 투자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요소 중 하나다.
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영국 기후변화위원회(CCC)는 최근 보고서에서 전기화와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를 더욱 높이고, 전기요금 체계 개편과 전력망 투자도 병행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청정에너지 산업이 성장하고 있지만 난방과 교통의 전기화는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