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유럽 방산산업이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변화를 맞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 최대 지상무기 제조업체 KNDS(KMW+Nexter Defense Systems)의 공동 지배체제를 구축하기로 합의하면서 유럽 방산업계가 본격적인 통합 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번 움직임은 파이낸셜타임스(이하 FT)가 22일(현지시간) 「Germany reaches deal to buy 40% of Europe's biggest tank maker」 제하의 기사에서 처음 상세 보도하면서 국제 방산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보도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KNDS의 독일 측 대주주인 보데·베그만 가문으로부터 지분 40%를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프랑스 정부 역시 기존 50% 보유 지분을 40%로 조정하고 나머지 20%는 기업공개(IPO)를 통해 시장에 공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독일 의회 예산위원회의 최종 승인 절차가 남아 있지만 사실상 양국이 KNDS를 공동 통제하는 체제가 마련된 셈이다.
이는 단순한 기업 지분 거래가 아니다.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추진해온 재무장 정책이 이제 무기 구매 단계를 넘어 산업 통합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무기를 사는 유럽에서 무기를 만드는 유럽으로
이번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안보 환경 변화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 안보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전쟁 발발 이후 유럽 국가들은 대규모 무기 지원에 나섰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다.
포탄 재고가 빠르게 소진됐고 방공미사일 생산능력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군수품 생산라인이 수십 년간 축소된 탓에 생산량을 늘리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 유럽 각국은 뒤늦게 냉전 종식 이후 지속해온 국방비 축소 정책의 한계를 체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장기적으로 유럽 방위에 어느 정도 개입할지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유럽 스스로 방어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유럽연합(EU)은 올해 들어 'ReArm Europe(유럽 재무장)' 정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핵심은 단순히 무기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전차와 포탄, 미사일, 방공체계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KNDS는 바로 그 전략의 중심에 위치한 기업이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KNDS는 유럽 육상무기 산업의 상징적 존재다. 2015년 독일의 크라우스마파이베그만(KMW)과 프랑스 국영 방산기업 넥스터(Nexter)가 합병해 설립된 KNDS는 독일군의 주력 전차인 레오파르트2와 프랑스군의 르클레르 전차를 생산한다.
또 PzH2000 자주포, 푸마 보병전투장갑차, 복서 장갑차 등 유럽 주요 국가들이 운용하는 핵심 무기체계를 공급하고 있다. 본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으며 직원 수는 1만1000명 이상, 2024년 기준 매출은 38억 유로(약 6조원) 규모에 달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수주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KNDS는 지난해 신규 수주액이 112억 유로를 기록했으며 수주잔고는 235억 유로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각국이 군비 확장에 나서면서 전차와 자주포, 탄약 수요가 급증한 결과다. 업계에서는 KNDS가 사실상 유럽 육군 전력의 핵심 공급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 유럽판 록히드마틴 만들기가 한국 방산에 미치는 영향
이번 지배구조 개편의 본질은 따로 있다. 유럽은 오랫동안 미국 방산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초대형 방산기업 부재에 시달려 왔다. 미국에는 록히드마틴, RTX, 노스럽그러먼, 제너럴다이내믹스 같은 글로벌 방산기업이 존재하지만 유럽은 국가별 기업이 분산돼 있었다.
독일은 독일대로,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대로 별도의 무기체계를 개발해 왔다. 이 과정에서 연구개발 비용은 증가하고 생산 효율은 떨어지는 문제가 반복됐다. KNDS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첫 번째 범유럽 방산 플랫폼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번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KNDS를 유럽 방산 통합의 중심 기업으로 육성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실제 양국 정부는 공동 성명에서 "유럽의 산업 및 방위 역량 강화와 유럽 주권 강화를 위한 결정"이라고 이번 합의를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결정이 프랑스와 독일의 차세대 전투기 사업인 FCAS(Future Combat Air System) 공동개발이 사실상 무산된 직후 나왔다는 점이다. 양국은 오랫동안 차세대 전투기 개발을 추진했지만 사업 주도권과 기술 이전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최근 협력이 중단됐다.
그러나 공중전력 분야에서 갈등이 발생했음에도 지상무기 분야에서는 오히려 협력을 강화한 것이다. 유럽 안보 전문가들은 KNDS가 향후 프랑스-독일 방산 협력의 핵심 축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양국이 추진 중인 차세대 전차 사업 MGCS(Main Ground Combat System)는 KNDS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프로젝트로 꼽힌다. MGCS는 현재 운용 중인 레오파르트2와 르클레르 전차를 대체할 차세대 플랫폼이다. 인공지능 기반 전장관리 시스템과 무인전투체계가 결합된 미래형 전차 개념이 적용될 예정이다. 개발 목표 시점은 2040년 전후다.
한국 방산업계 입장에서 이번 뉴스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K방산은 폴란드를 중심으로 유럽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K2 흑표 전차와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K2 전차는 빠른 생산 속도와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유럽 시장에서 레오파르트2의 대안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KNDS가 독일·프랑스 정부의 직접 지원 아래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차세대 전차 사업을 본격화할 경우 경쟁 구도는 달라질 수 있다.
유럽연합 내부에서 최근 제기되는 'Buy European(유럽산 우선 구매)' 기조 역시 변수다. 유럽 재무장 예산이 유럽 기업 중심으로 집행될 경우 역외 국가인 한국 기업들의 진입 장벽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유럽의 생산 확대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 수요도 늘어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폴란드 현지 생산 모델처럼 유럽 국가들이 생산능력 확보를 위해 한국 기업과의 공동 생산을 선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KNDS 지배구조 개편은 단순한 기업 뉴스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이 선택한 새로운 안보 전략, 즉 '재무장'에서 '산업 통합'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향후 유럽 시장에서 K2 흑표와 K9 자주포, 천궁-II를 비롯한 K방산의 경쟁 환경을 바꿔놓을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