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태국의 300억 달러 승부수..말라카 해협에 도전장 던진 ‘랜드 브리지’ 프로젝트

중동 위기로 공급망 불안 커지자 태국 정부 재추진
아시아 물류지도 바꿀 수 있을까, 국제 해운업계 관심 집중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태국 정부가 약 300억달러(약 41조원) 규모의 초대형 물류 인프라 사업인 ‘랜드 브리지(Land Bridge)’ 프로젝트를 재추진하면서 국제 해운업계와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사업은 지난 18일 로이터통신이 심층 분석 기사로 다루면서 다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로이터는 최근 중동 정세 악화와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 고조가 글로벌 공급망 불안을 키우는 가운데 태국 정부가 오랫동안 구상해온 대체 물류 통로 구축 계획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랜드 브리지 프로젝트는 태국 남부 동부 해안의 춤폰과 서부 해안의 라농을 연결하는 대규모 물류 회랑 사업이다. 양쪽에 심해항을 건설하고 철도와 고속도로를 연결해 화물을 육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태국 정부는 이를 통해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물류 허브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을 내놓고 있다.

 

이 사업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항만 두 곳을 연결하는 인프라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랜드 브리지는 사실상 세계 해상 교역의 심장부로 불리는 말라카 해협에 대한 첫 번째 본격적인 도전으로 평가된다.

 

◆ 하루 수백척 지나는 세계 무역의 목줄 말라카 해협
말라카 해협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위치한 길이 약 900km의 좁은 수로다. 유럽과 중동, 아시아를 연결하는 최단 항로로 기능하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 운송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제에너지기구(IEA)와 해운업계 자료에 따르면 하루 수백 척의 선박이 이 해협을 통과하며, 중국·일본·한국으로 향하는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상당 부분도 이곳을 지난다. 세계 해상 교역량의 약 4분의 1이 말라카 해협을 거치는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다. 2021년 수에즈 운하에서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좌초하면서 세계 물류가 마비된 사례는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다. 최근에는 이란과 이스라엘 간 긴장이 격화되면서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우려도 커졌다.

 

그간 국제 물류업계에서는 21세기 글로벌 경제가 몇 개의 좁은 해협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태국이 내세우는 랜드 브리지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파고든 프로젝트다. 태국 정부는 랜드 브리지를 이용할 경우 일부 노선에서 최대 1,200km 이상의 항해 거리를 줄일 수 있고 운송 시간도 최대 14일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태국 경제의 미래를 건 국가 프로젝트 될 수도
랜드 브리지는 단순한 물류 사업이 아니라 태국 경제의 미래 전략과도 직결된다. 태국은 오랫동안 자동차와 전자제품 생산기지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가 제조업 투자 유치 경쟁에서 빠르게 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관광 산업 역시 코로나19 이후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중국 경기 둔화와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등 불확실성이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태국 정부는 물류 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 하고 있다.

 

실제로 태국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다. 만약 랜드 브리지가 성공적으로 구축된다면 태국은 제조업 중심 국가에서 아시아 물류 중심 국가로 변신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있다. 정부는 사업이 완성될 경우 수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외국인 투자 유입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랜드 브리지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시선도 엇갈린다. 가장 관심을 보이는 국가는 중국이다. 중국은 에너지 수입의 상당 부분을 말라카 해협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가 오래전부터 우려해온 이른바 ‘말라카 딜레마’도 여기서 비롯됐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말라카 해협을 통제할 경우 에너지 안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중국은 미얀마를 통한 육상 에너지 수송망, 파키스탄 과다르항 개발, 일대일로 사업 등을 추진하며 대체 경로 확보에 공을 들여왔다. 랜드 브리지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에서 활용 가능성이 거론된다.

 

반면 싱가포르는 복잡한 입장에 놓여 있다. 싱가포르는 현재 세계 최대 환적항 가운데 하나로 막대한 물동량을 처리하고 있다. 태국 프로젝트가 단기간에 싱가포르를 위협하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우세하지만, 일부 물동량이 분산될 경우 장기적으로는 경쟁 구도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성이다. 선박이 항구에 정박해 컨테이너를 내리고, 이를 육상으로 이동시킨 뒤 다시 다른 선박에 적재하는 과정은 추가 비용을 발생시킨다. 해운업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용 효율성인데, 랜드 브리지가 기존 항로보다 충분한 비용 절감 효과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환경 문제도 심각하다. 사업 예정 지역에는 어업과 농업에 의존하는 지역사회가 형성돼 있다. 주민들은 대규모 항만 개발이 생태계를 훼손하고 생계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태국 정부 역시 환경영향평가와 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다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3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지가 최대 변수로 꼽힌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장기간 수익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초대형 인프라 사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할지도 불확실하다.

 

결국 랜드 브리지 프로젝트는 단순한 항만 개발 사업이 아니다. 이는 공급망 재편과 미·중 경쟁, 에너지 안보, 동남아 경제 성장 전략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프로젝트다. 태국이 꿈꾸는 새로운 물류 혁명이 현실이 될지, 아니면 수십 년 동안 반복돼온 구상에 그칠지는 향후 투자 유치와 국제 해운업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다만 이번 로이터 보도를 계기로 랜드 브리지가 다시 국제 무대의 중심 의제로 떠오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