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재영 기자] 최근 중동 지역을 둘러싼 지정학적 불안이 고조되면서 세계 에너지 시장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국제 유가가 출렁이고 주요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반복되는 가운데 한국이 캐나다산 원유 수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어 주목된다.
정부는 이를 단순한 수입선 확대가 아니라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전략적 조치로 보고 있다. 실제로 관세 행정 개선을 계기로 캐나다산 원유 도입이 급증하면서 중동 편중 구조를 완화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 원유 넘어 LNG·수소·핵심광물 협력 가능성 커져
관세청은 19일 캐나다 앨버타주 에너지·광물부 장관 브라이언 진과 함께 SK이노베이션 울산CLX를 방문해 캐나다산 원유 수입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번 방문은 지난 4월 한국 관세청과 캐나다 앨버타주 정부가 체결한 '원산지 입증서류 간소화 공동합의' 이후 처음 이뤄진 후속 협력 행보다. 당시 양측은 캐나다산 원유가 한·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의 혜택을 보다 쉽게 적용받을 수 있도록 원산지 입증 절차를 간소화하는 데 합의했다.
표면적으로는 통관과 원산지 증명 절차에 관한 협력처럼 보이지만 실제 파급효과는 훨씬 크다. 기존에는 캐나다산 원유를 수입할 때 생산자별·수출 건별로 복잡한 원산지 입증 절차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앨버타주 정부가 생산자를 대신해 발급한 확인 서류를 한국 관세당국이 인정하면서 행정 부담이 크게 줄어들게 됐다.
무엇보다 캐나다산 원유에 적용되는 관세율이 기존 3%에서 0%로 낮아지는 효과가 발생했다. 원유처럼 거래 규모가 큰 품목의 경우 3%의 관세 차이는 수입 비용과 가격 경쟁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성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6월 2일 약 60만 배럴 규모의 캐나다산 원유가 처음으로 FTA 특혜관세 0%를 적용받아 국내에 수입됐다. 또한 올해 상반기에만 총 816만 배럴의 캐나다산 원유가 도입될 예정인데, 이는 지난해 연간 도입량의 1.7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한적이었던 캐나다산 원유 수입이 관세 장벽 해소 이후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협력의 의미는 단순한 수입 물량 증가를 넘어선다. 한국은 세계 5위권 원유 수입국이지만 에너지 자급률이 매우 낮다. 원유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는 구조다. 특히 수입 원유의 70% 이상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등 중동 국가에 집중돼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경제성 측면에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지정학적 위험에 취약하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실제로 최근 수년 동안 국제 원유 시장은 중동 지역 정세에 따라 크게 흔들려 왔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 이란과 이스라엘 간 갈등 고조, 홍해와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 등은 국제 유가 상승과 공급 차질 우려를 반복적으로 불러왔다.
특히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통과하는 핵심 수송로다. 한국으로 향하는 중동산 원유 역시 대부분 이 해협을 지나기 때문에 긴장이 고조될 경우 국내 에너지 수급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중동산 원유는 여전히 한국 에너지 안보의 핵심 축이지만 특정 지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언제든 리스크가 될 수 있다"며 "최근 국제 정세를 감안하면 공급선 다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과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 세계 최대 수준 원유 매장량 보유 캐나다가 주목받는 이유
이런 상황에서 캐나다는 한국이 주목하는 대안 공급처 가운데 하나다. 캐나다는 세계 최대 수준의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자원 부국이다. 특히 앨버타주는 캐나다 원유 생산의 중심지로 오일샌드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생산 체계를 갖추고 있다.
정치적 안정성이 높고 미국과 긴밀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중동이나 일부 신흥 산유국에 비해 공급 중단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의미다.
다만 캐나다산 원유는 점도가 높고 황 함량이 많은 초중질유 비중이 높아 정제 과정이 까다롭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정유사들의 처리 능력이 수입 확대의 관건으로 여겨져 왔다.
관세청과 앨버타주 정부가 이번에 찾은 SK이노베이션 울산CLX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시설로 평가된다. 울산CLX는 초중질유를 다른 원유와 혼합해 효율적으로 정제할 수 있는 설비와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업계에서는 울산CLX가 캐나다산 원유 확대의 핵심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현장 점검에서는 현재 시설의 처리 능력뿐 아니라 향후 시설 확충을 통한 추가 도입 가능성도 함께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캐나다산 원유가 단기적 대체재가 아니라 장기적인 공급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과정으로 해석된다.
이번 사례는 관세 행정이 실질적인 경제 효과를 창출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주목받는다. 통상 관세청의 역할은 세금 징수와 통관 관리로 인식되지만, 이번 협력은 제도 개선이 실제 교역 확대와 공급망 안정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관세청과 앨버타주 정부가 구축한 원산지 입증 간소화 체계는 기업 입장에서 행정 비용과 시간 부담을 줄여준다. 동시에 FTA 활용도를 높여 수입 비용 절감 효과도 제공한다. 그 결과가 올해 상반기 816만 배럴이라는 수입 물량 증가로 나타났다는 것이 관세청의 설명이다.
브라이언 진 앨버타주 에너지·광물부 장관은 "한국 관세청의 관세 인하 조치로 한국과의 에너지 교역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양측의 세관 협력이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종욱 관세청장 역시 "이번 캐나다산 원유 수입 확대는 일시적인 대응이 아니라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시작점"이라고 강조했다.
업계는 이번 협력이 원유 수입 확대에만 머물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 안정성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면서 자원 부국인 캐나다의 전략적 가치도 높아지고 있다.
캐나다는 원유뿐 아니라 LNG, 수소, 우라늄, 니켈, 리튬 등 다양한 에너지·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 추진하는 탄소중립과 첨단산업 공급망 구축 과정에서도 중요한 협력 대상이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와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핵심광물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앨버타주를 비롯한 캐나다 지역과의 협력 확대는 새로운 경제 협력 모델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관세청과 앨버타주의 협력은 단순한 원유 통관 절차 개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중동 의존 구조를 완화하고 공급망 안정성을 높이려는 한국의 에너지 전략이 실제 수입 증가라는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에너지 안보 정책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