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재영 기자] 일본 정부가 반도체와 조선, 드론, 희토류 등 전략산업의 해외 사업에 대해 국가가 직접 위험을 분담하는 제도 마련에 나섰다. 민간 기업이 부담하기 어려운 투자 위험을 정부가 함께 떠안음으로써 공급망 확보와 산업 경쟁력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번 조치는 지난 10일 일본 국회가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이하 경제안보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본격화됐다.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과 NHK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개정안은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의 기능을 확대해 경제안보상 중요성이 큰 해외 사업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원 대상은 반도체와 조선, 무인기(드론), 희토류 등 핵심 광물 확보 사업, 항만 개발 사업 등이다. 일본 기업이 동남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등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지역에서 전략사업을 추진할 경우 정부가 금융 지원과 함께 사업 위험 일부를 분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보조금이나 정책금융을 통해 기업 활동을 지원해왔지만 이번 개정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은 지역에서 진행되는 사업의 경우 민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 가능성을 국가가 함께 부담함으로써 공급망 확보를 국가 차원의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개정안을 두고 경제안보 정책의 해외 확장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국내 산업 보호를 넘어 해외 자원과 생산거점 확보까지 국가가 전략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법 개정은 최근 일본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경제안보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은 2022년 경제안전보장추진법 제정 이후 중요 물자 공급망 강화, 핵심 인프라 보호, 첨단기술 육성 및 관리 체계 구축 등을 추진해 왔다. 여기에 해외 공급망 확보까지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구조를 추가한 것이다.
◆ 공급망 재편 속 '산업정책 국가'로 돌아가는 일본
일본 정부가 이 같은 정책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미중 전략경쟁 심화다. 반도체와 배터리, 핵심 광물 등이 국가안보 자산으로 인식되면서 각국 정부가 자국 산업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통해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고, 유럽연합(EU) 역시 핵심원자재법(CRMA) 등을 통해 공급망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경제안보를 국가 정책의 핵심 축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현재 일본은 희토류와 배터리 원료,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핵심 소재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과거 중국과의 외교 갈등 과정에서 희토류 수출 제한 조치를 경험한 이후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국가적 과제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일본 정부의 인식을 바꾼 계기였다. 마스크와 의약품 원료 부족 사태를 겪으면서 공급망 안정성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점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 정부는 생산기지 국내 복귀 정책과 공급망 다변화 정책을 병행해 추진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반도체 산업은 일본 경제안보 전략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은 이후 한국과 대만, 미국 기업들에 밀려 경쟁력을 잃었다. 한때 세계 시장 점유율 50%를 넘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은 현재 첨단 공정 분야에서 존재감이 크게 약화된 상태다. 이에 일본 정부는 최근 몇 년간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 첨단 반도체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반도체 기업인 라피더스는 차세대 2나노미터 공정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대만의 TSMC 구마모토 공장 유치에도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했다.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산업을 자동차·방산·인공지능(AI) 산업의 기반으로 규정하며 국가 차원의 지원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업도 주요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한때 세계 조선시장을 주도했던 일본은 현재 한국과 중국에 밀려 점유율이 크게 낮아졌지만,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특수선박 등 일부 분야에서는 여전히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조선업을 단순 제조업이 아닌 해양안보와 물류 공급망을 뒷받침하는 전략산업으로 보고 있으며, 해외 항만 개발 사업과 연계한 지원 확대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항만과 해운 네트워크 확보를 국가 전략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드론 산업 역시 주목받고 있다. 일본은 물류와 재난 대응, 방위산업에 활용할 수 있는 무인기 기술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드론의 군사적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주요 국가들이 관련 산업 육성에 경쟁적으로 나서는 가운데 일본 역시 국가 지원 확대에 나선 것이다.
◆ 국가가 위험 떠안는 일본, 한국은 괜찮은가
전문가들은 이번 경제안보법 개정이 일본 산업정책의 방향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평가한다. 과거 일본이 자유무역과 민간 중심의 성장 모델을 강조했다면 최근에는 국가가 직접 전략산업 육성에 나서는 이른바 '경제안보 국가' 모델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최근 몇 년 동안 방위비 증액과 함께 반도체, 배터리, 수소, 우주산업, 양자기술,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국가 지원을 확대해 왔다. 경제산업성과 재무성, 외무성이 경제안보를 공동 과제로 다루는 것도 과거와 다른 모습이다.
특히 이번 개정안은 단순한 보조금 지급을 넘어 정부가 투자 실패 가능성까지 일정 부분 분담하는 구조를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수익성이 불확실하더라도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업이라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내부에서도 이를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찬성론자들은 중국과 미국이 모두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일본만 시장 원칙을 고수할 경우 전략산업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일각에서는 정부가 지나치게 시장에 개입할 경우 세금으로 기업의 실패를 떠안게 되는 이른바 '도덕적 해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이런 일본의 정책 변화는 한국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 역시 반도체와 배터리, 조선, 방산 등 전략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산업정책은 상대적으로 민간 기업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 물론 최근 들어 국가첨단전략산업법 제정과 세제 지원 확대 등을 통해 정부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일본처럼 국가가 직접 투자 위험을 분담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향후 해외 자원 개발과 반도체 공급망 구축, 항만 인프라 사업 등에서 일본 기업들이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수주 경쟁에 나설 경우 한국 기업들과의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국가 지원 규모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새로운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도 제기된다.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는 가운데 일본의 이번 선택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국가 경쟁력의 핵심 산업을 더 이상 시장 논리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와 조선, 드론을 둘러싼 경쟁이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경쟁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안보 전략은 이제 막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일본이 선택한 '국가 주도 산업정책'이 실제 제조업 경쟁력 회복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한국이 이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