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세계경제포럼(WEF)이 2026~2027년 예상되는 엘니뇨를 글로벌 리스크로 규정하며 식량안보 경고음을 울렸다. 이상기후로 인한 농업 생산 차질이 국제 곡물 가격 상승과 공급망 불안으로 이어질 경우 세계 경제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WEF는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엘니뇨를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닌 경제·사회·안보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위험으로 평가했다. 보고서는 기후 충격이 식량 생산 감소와 가격 급등, 무역 차질, 사회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식량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국제사회가 엘니뇨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세계 식량 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난 상황에서 또 다른 충격 요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때 개발도상국의 문제로 여겨졌던 식량안보는 이제 주요국 경제정책과 국가안보 전략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 WEF "엘니뇨, 세계 경제 새 뇌관 될 수도"
엘니뇨는 적도 태평양 동부와 중부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아지는 현상이다. 자연적인 기후 순환 과정의 하나지만 그 영향은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난다. 지역에 따라 극심한 가뭄과 폭우, 폭염을 유발하며 농업 생산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실제로 과거 강한 엘니뇨가 발생했던 시기에는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한 사례가 반복됐다. 1997~1998년 엘니뇨 당시 동남아시아와 호주 일부 지역에서는 심각한 가뭄이 발생했고, 남미 일부 지역은 홍수 피해를 입었다. 2015~2016년 엘니뇨 역시 농업 생산 감소와 식량 가격 불안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오늘날 세계 식량시장이 과거보다 훨씬 취약해졌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후 공급망은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 곡물 시장 구조 자체를 바꿔 놓았다. 여기에 보호무역주의와 지정학적 갈등까지 겹치면서 식량 공급망은 이전보다 훨씬 불안정해졌다. 엘니뇨가 현실화될 경우 이러한 취약성이 다시 드러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WEF가 이번 보고서에서 강조한 것은 농업 생산 감소 자체가 아니다. 보고서가 주목한 것은 기후 충격이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흔드는 '복합 위험'이다. 과거에는 특정 국가가 흉작을 겪더라도 다른 생산국이 공급을 보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상기후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는 세계 식량 시스템의 회복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대표적인 사례가 쌀이다.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세계 최대 쌀 생산·수출 지역으로 꼽힌다. 그러나 엘니뇨가 발생하면 강수량 감소와 가뭄 위험이 커진다. 생산량이 줄어들 경우 국제 쌀 가격은 빠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밀 시장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다. 호주와 아르헨티나는 세계 밀 공급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 지역이 가뭄이나 폭염에 노출될 경우 생산 감소와 가격 상승이 불가피하다.
옥수수는 세계 식량 시스템에서 더욱 중요한 품목이다. 미국과 브라질은 세계 최대 옥수수 생산국이다. 옥수수 가격은 사료 가격과 직결되며 이는 다시 육류와 유제품 가격으로 이어진다. 곡물 가격 상승이 결국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실제 세계 경제는 이미 식량 가격 충격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지는지 경험한 바 있다. 2007~2008년 국제 곡물 가격 급등은 세계 식량위기를 촉발했다. 개발도상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국제사회는 식량 부족 문제를 주요 안보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한 '아랍의 봄' 역시 식량 가격 상승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밀 가격 급등은 사회 불만을 키우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됐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식량안보 문제를 다시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 가운데 하나인 우크라이나의 수출길이 막히자 국제 밀 가격은 급등했다.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은 즉각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후 각국은 식량 정책을 안보 정책의 일부로 다루기 시작했다. 인도는 쌀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했고, 여러 국가는 전략 비축량 확대와 수입선 다변화에 나섰다. 식량을 자유무역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가 확보해야 할 전략 자산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WEF가 이번 보고서에서 엘니뇨를 글로벌 리스크로 규정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기후 충격과 공급망 불안, 지정학적 갈등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세계 식량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다.
◆ 식탁에서 시작되는 물가 충격 현명하게 대처해야
엘니뇨의 위험은 농업 생산에만 그치지 않는다. 곡물 가격 상승은 물가와 금리, 소비, 성장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최근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유럽중앙은행(ECB)은 물가 안정 여부에 따라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 가격 상승은 새로운 부담 요인이 될 수 있다. 밀 가격이 오르면 빵과 라면, 과자 가격이 오른다. 옥수수 가격 상승은 사료비 증가로 이어지고, 결국 육류와 유제품 가격을 끌어올린다. 식용유와 가공식품 가격도 영향을 받는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생활물가의 상당 부분이 식품 가격과 연결돼 있는 셈이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도 최근 보고서에서 기후 변화가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구조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에너지 가격뿐 아니라 농산물 가격 역시 물가 흐름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WEF는 보고서에서 식량안보를 에너지 안보, 공급망 안정성과 함께 향후 세계 경제를 좌우할 핵심 위험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기후 변화가 농업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이는 물가 상승과 성장 둔화,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연쇄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 역시 이러한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식량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곡물 자급률은 20% 안팎 수준에 머물고 있다. 쌀을 제외하면 밀과 옥수수, 대두 등 주요 곡물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국제 시장에서 공급 차질이나 가격 급등이 발생할 경우 국내 경제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일례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밀 가격이 급등했을 때 국내에서도 라면과 빵, 과자 가격이 줄줄이 올랐다. 사료 가격 상승은 축산 농가의 부담을 키웠고 육류 가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엘니뇨로 주요 생산국의 작황이 악화될 경우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기후 변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빈번해지고 있다는 점은 우려를 키운다. 과거에는 특정 시기에 발생하는 자연현상으로 여겨졌던 기후 충격이 이제는 상시적인 위험 요인으로 변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식량안보가 에너지 안보만큼 중요한 정책 과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단순한 곡물 확보를 넘어 공급망 관리와 비축 전략, 해외 농업 협력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