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방심은 금물.. 세계 경제 덮친 저성장 함정의 덫

세계은행 ‘잃어버린 2020년대’ 경고하며 주의 환기 나서
재정부담 미국, 성장 둔화 중국 성장엔진 역할 상실 우려 커져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세계 경제에 저성장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다. 주요국이 잇따른 경기침체 우려를 피해 가고 있음에도 성장률은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고금리 속에서도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고 유럽도 에너지 위기의 최악을 넘겼지만 세계 경제 전반의 활력은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은행은 지난 11일(현지시간) 발표한 '세계경제전망(Global Economic Prospects)'에서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5%로 제시했다. 코로나19 시기를 제외하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세계은행은 보고서에서 현재 흐름이 이어질 경우 2020년대가 세계 경제의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단순히 성장률 숫자가 아니다. 세계 경제가 일시적인 경기 둔화를 넘어 구조적인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막대한 유동성과 중국의 고성장에 힘입어 비교적 빠르게 회복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도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전례 없는 재정·통화 정책으로 충격을 흡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 성장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우려시되는 것이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다. 선진국 대부분이 고령화 국면에 접어들었고 중국마저 인구 감소 시대를 맞았다. 노동력 감소는 곧 성장 잠재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과거에는 생산성 향상이 이를 보완했지만 최근 들어 생산성 증가율 역시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첨단 기술 발전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경제 전반에 미치는 효과는 기대만큼 크지 않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인터넷 혁명이나 세계화가 가져왔던 폭발적인 생산성 향상 효과를 대체할 새로운 성장 동력이 아직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국제경제 전문가는 "과거에는 위기가 지나가면 성장률도 자연스럽게 회복됐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며 "세계 경제가 저성장을 기본값으로 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 미국도 중국도 성장 엔진 역할 못하는 시대
세계 경제를 떠받쳐온 두 축인 미국과 중국 역시 구조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견조한 성장세를 보이는 국가다. 소비는 예상보다 강하고 노동시장도 안정적이다. 그러나 미국 경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안 요인도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정 부담이다. 미국 연방정부 부채는 이미 국내총생산(GDP)을 웃도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고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정부의 이자 비용도 빠르게 늘고 있다. 최근 국제 금융시장에서 미국 국채 수익률 움직임에 대한 경계가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 투자 역시 예전만 못하다. 높은 자금 조달 비용과 불확실한 통상 환경이 기업들의 투자 결정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국은 더욱 복잡한 과제를 안고 있다. 한때 연평균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세계 경제를 견인했던 중국은 이제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 인구 감소라는 삼중고에 직면해 있다. 부동산이 중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단기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평가가 많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둔화가 세계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은 원자재 수요와 제조업 교역을 이끌며 글로벌 성장의 핵심 동력 역할을 해왔다. 중국 경제가 예전 같은 성장세를 보이지 못한다면 세계 경제 역시 과거 수준의 성장률을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은행이 저성장을 우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에는 미국이 흔들리면 중국이 버텼고, 중국이 둔화되면 미국이 소비를 통해 세계 경제를 지탱했다. 하지만 지금은 양국 모두 구조적 부담을 안고 있다.

 

여기에 미·중 전략 경쟁이 장기화되면서 세계화의 흐름도 달라지고 있다. 기업들은 비용 절감보다 공급망 안정성을 우선하기 시작했고 각국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경제 효율성보다 안보와 지정학이 중요해진 시대다. 이는 글로벌 교역 증가세를 둔화시키고 기업들의 투자 비용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은행은 올해 세계 교역 증가율이 과거 평균을 밑돌 것으로 전망했다. 한때 세계 경제를 가장 빠르게 성장시켰던 자유무역의 효과가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나.. 한국 경제 적신호 등장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가장 민감한 국가 중 하나다. 경제 규모에 비해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 성장률이 낮아지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이 교역이고, 교역 둔화는 곧 한국 기업들의 실적과 투자에 영향을 미친다.

 

반도체와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은 모두 글로벌 수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업황 개선이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지만 세계 성장률 자체가 낮아질 경우 회복세가 예상보다 약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한국 역시 세계은행이 지적한 구조적 위험 요인을 대부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생산가능인구 감소도 이미 시작됐다. 출산율은 장기간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으며 가계부채 부담도 여전히 크다.

 

한 국내 경제연구기관 연구위원은 "세계 경제의 저성장 추세가 고착화될 경우 한국은 수출 둔화와 인구구조 변화라는 이중 압박을 받을 수 있다"며 "과거처럼 세계 경제 회복만 기다리는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세계은행이 던진 메시지는 단순한 성장률 전망 수정이 아니다. 경제가 무너지는 위기는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성장의 동력이 서서히 약해지는 현상은 훨씬 늦게 드러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세계 경제의 적은 금융 시스템 붕괴였다. 2020년 팬데믹 때는 경제활동 자체가 멈췄다.

 

지금 세계 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그보다 더 복잡하다. 눈앞의 위기는 보이지 않지만 성장의 힘은 조금씩 약해지고 있다. 침체는 피했지만 활력도 사라진 세계 경제. 세계은행이 '잃어버린 2020년대'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경고가 단순한 전망 보고서로 남을지, 아니면 저성장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계 경제의 가장 큰 위험이 더 이상 경기침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제 각국이 마주한 과제는 위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엔진을 다시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