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반도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으로 떠오른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동안 양국은 첨단 AI 반도체와 반도체 장비를 중심으로 공방을 벌여왔지만 최근에는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핵심 소재가 새로운 전략 자산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의 차세대 핵심 기술로 꼽히는 광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인듐포스파이드(Indium Phosphide·InP)를 둘러싸고 공급망 긴장이 고조되면서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희토류에 이은 '제2의 공급망 무기화' 사례로 평가하며 AI 시대 패권 경쟁의 승부처가 칩 성능에서 공급망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 AI 산업의 새로운 병목, 왜 인듐포스파이드인가
중국이 AI 데이터센터 핵심 소재인 인듐포스파이드를 사실상 전략 자산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10일(현지 시간) 로이터 통신은 중국의 인듐포스파이드 수출 통제가 글로벌 AI 데이터센터 구축의 새로운 걸림돌로 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미국 정부와 업계는 중국의 수출 허가 지연 문제를 주요 통상 현안으로 다루고 있으며, 일부 광반도체 기업들은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 압박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는 특히 미국 광반도체 업체인 코히런트의 짐 앤더슨 최고경영자가 미국 경제사절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해 관련 문제를 제기했으며 미중 간 통상 협의 과정에서도 인듐포스파이드 공급 문제가 논의됐다고 전했다. AI 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소재 문제가 외교 의제로까지 격상된 셈이다.
업계가 긴장하는 이유는 인듐포스파이드가 단순한 산업 원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AI 산업의 경쟁은 더 많은 GPU를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생성형 AI 모델이 거대해질수록 수만 개의 GPU가 동시에 연결돼야 하고, 데이터센터 내부에서는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오간다. AI 모델 학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이동량은 과거 인터넷 서비스나 클라우드 시스템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연결 방식이다. 지금까지 데이터센터는 구리선 기반의 전기 신호를 통해 데이터를 전송했다. 하지만 AI 서버 규모가 커질수록 전력 소비와 발열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기존 방식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업계는 전기 대신 빛을 이용하는 광통신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광통신은 빛을 통해 데이터를 전달하기 때문에 속도가 빠르고 에너지 효율도 높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사용량을 줄이는 동시에 데이터 전송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어 차세대 핵심 기술로 평가받는다.
인듐포스파이드는 바로 이 광통신 기술의 핵심 부품인 광반도체 제작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레이저와 광검출기, 광모듈 등에 활용되며 현재로서는 대체 가능한 소재가 사실상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로이터는 업계 관계자들을 인용해 인듐포스파이드가 AI 데이터센터 구축의 핵심 병목 요소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글로벌 빅테크들도 광반도체 확보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엔비디아는 올해 미국 광통신 기업인 코히런트와 루멘텀에 각각 2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단행했으며, 반도체 기업 마벨 역시 포토닉스 기술 확보를 위해 관련 기업 인수에 나섰다.
문제는 공급망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기준 전 세계 인듐 생산량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희토류와 마찬가지로 특정 원료 생산과 정제 분야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2025년 2월부터 인듐포스파이드 관련 수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미국과 대만의 광통신 기업들은 원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일부 업체들은 생산 차질과 주문 적체 현상까지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2위 인듐포스파이드 기판 생산업체인 AXT는 최근 "인듐포스파이드 수출 허가 문제가 현재 가장 큰 경영 과제"라고 밝히기도 했다.
공급 부족은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6인치 인듐포스파이드 웨이퍼 평균 가격은 수출 규제 이후 약 250% 급등해 장당 5000달러 수준까지 상승했다. 이는 단순한 소재 가격 인상을 넘어 AI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칩 전쟁에서 공급망 전쟁으로… 한국의 기회와 과제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가장 큰 변화는 AI 경쟁의 무대가 반도체 성능에서 공급망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국은 첨단 AI 반도체 수출 통제를 통해 중국의 기술 발전을 견제해왔다. 엔비디아의 H100과 블랙웰 계열 GPU를 비롯한 최첨단 반도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중국 기업의 해외 자회사를 통한 우회 조달 가능성까지 차단하는 조치를 내놓으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반면 중국은 자신들이 우위를 점한 공급망을 활용해 대응하고 있다. 이미 희토류를 통해 자동차와 방산, 반도체 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중국은 이제 인듐포스파이드와 같은 첨단 소재 분야에서도 유사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로이터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중국이 완제품 수출을 제한하는 대신 산업 성장의 핵심이 되는 상류 공급망을 통제하는 보다 정교한 전략을 구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다. AI 산업은 특정 국가가 독자적으로 완성할 수 없는 구조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AI 플랫폼, 대만은 파운드리, 네덜란드는 노광장비,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중국은 일부 전략 광물과 소재 분야에서 각각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AI 경쟁력이 단순히 GPU 개수로 결정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력 인프라와 냉각 시스템, 광통신 장비, 첨단 소재, 반도체 제조 기술이 모두 결합돼야 비로소 AI 생태계가 완성된다.
한국 역시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직접 받을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 AI 서버에 필수적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그러나 인듐포스파이드 공급난이 장기화될 경우 글로벌 데이터센터 구축 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광통신 장비와 광반도체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AI 서버 증설 계획이 늦어질 수 있고, 이는 결국 메모리 반도체 수요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반면 새로운 기회도 존재한다. 미국과 유럽이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할 경우 한국의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새로운 공급망의 한 축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광통신 부품과 첨단 소재 분야에서는 대규모 투자와 협력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미국과 동맹국들은 반도체뿐 아니라 핵심 광물과 전략 소재 공급망 재편을 국가 안보 차원의 과제로 다루고 있다. 인듐 역시 희토류와 마찬가지로 전략 자원으로 분류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결국 AI 시대의 승부는 더 이상 누가 더 좋은 칩을 만드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고 핵심 소재를 확보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희토류에서 시작된 공급망 경쟁은 이제 AI 데이터센터의 핵심 소재로까지 확산됐다. 중국의 인듐포스파이드 수출 통제는 그 상징적인 사례다. 반도체 전쟁이 공급망 전쟁으로 진화하는 가운데 한국 역시 기술 경쟁력뿐 아니라 자원과 소재 확보 전략까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