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유럽 항공업계가 올여름 항공유(제트연료) 공급난 우려를 진화하고 나섰다. 중동 지정학 리스크의 확산 속에 한때 유럽 주요 공항의 항공편 차질 가능성까지 거론됐지만 항공사들은 단기 공급에는 문제가 없다며 시장 불안 달래기에 나선 모습이다.
서둘러 진화에 나선 유럽 항공업계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시장에서는 구조적 공급 불안이 여전하다는 경고가 나온다. 유럽이 중동 의존도를 줄이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한국 정유업계가 새로운 공급 허브로 부상할 수 있다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 장기계약·재고 확대 통해 공급 리스크 줄였다지만
14일 국제 에너지 업계와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유럽 주요 항공사들은 최근 제기된 ‘여름 항공유 대란설’에 선을 긋고 있다. 로이터통신이 14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독일 루프트한자와 영국 TUI 등 유럽 주요 항공사들은 여름 성수기 운항에 필요한 연료 확보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일부 항공사는 장기 계약과 재고 확대를 통해 공급 리스크를 줄였다고 설명했다.
항공업계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시장 불안 차단에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여름 휴가철은 유럽 항공사의 연간 수익을 좌우하는 핵심 시기다. 한해 농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점에서의 공급 차질 우려가 소비심리를 위축시키고 예약 취소로 이어질 경우 실적에 직격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유럽 주요 공항과 연료 공급업체들은 최근 몇 달간 비축량을 늘리고 대체 공급선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중동 지역 공급 차질이 본격화하자 미국과 아프리카, 일부 아시아 국가로 조달처를 확대하는 움직임도 빨라졌다.
그러나 시장 안팎에서는 유럽 항공업계의 낙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5월 ‘Oil Market Report’를 통해 유럽이 여전히 중동산 항공유 감소분을 충분히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하며 우려를 표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유럽의 중동산 항공유 수입은 지난 3월 하루 평균 약 33만 배럴에서 4월 6만 배럴 수준으로 급감했다. 중동 긴장과 물류 차질로 기존 공급망이 흔들린 결과다. 문제는 대체 물량이다. 유럽은 미국과 나이지리아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급망 구축에 나섰지만 현재 확보한 대체 수입 규모는 이전 공급 감소분을 완전히 메우기엔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IEA는 유럽이 여름철 수급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선 이전 중동 의존 물량의 상당 부분을 빠르게 대체해야 하지만 실제 조달 속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당장의 대란은 없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것이 시장의 시각이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도 항공 수요 증가세 자체가 연료 수급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라고 본다. IATA가 발표한 2025~2026 글로벌 항공시장 전망 자료에 따르면 국제선 수요는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선 상태다. 특히 유럽과 중동, 아시아 노선 회복세가 강해 항공유 소비량 증가 압력도 커지고 있다. 공급망 충격이 작아 보여도 실제 시장에서는 작은 변수 하나가 가격 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 항공유 절대강자 한국에겐 또 다른 기회 열려
이 지점에서 한국 정유업계가 새롭게 주목받는다. 한국은 원유를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으로 전환하는 정제 고도화율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 경쟁력을 갖춘 국가 가운데 하나다. 국내 정유산업은 수출 중심 구조를 갖고 있으며 휘발유·경유뿐 아니라 항공유 생산 경쟁력도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에너지경제연구원(KEEI)과 산업연구원(KIET) 자료를 보면 한국 정유산업은 아시아 대표 석유제품 수출 허브 역할을 해왔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교란 시기마다 미국과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대체 공급 역할을 수행한 경험이 있다.
최근에는 유럽과의 연결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올해부터 지속가능항공유(SAF·Sustainable Aviation Fuel. 이하 SAF) 혼합 의무를 단계적으로 강화하면서 새로운 공급처 확보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SAF는 기존 화석연료 기반 항공유 대비 탄소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는 친환경 연료로 평가받지만 공급량이 제한적이고 가격이 높다는 문제가 있다.
국내 정유업계는 이미 대응에 나선 상태다. SK 에너지는 국내 정유사 가운데 처음으로 유럽에 SAF를 수출했고, GS 칼텍스와 S-오일, 현대 오일뱅크도 관련 생산 및 공급 확대 전략을 검토 중이다. 업계에서는 유럽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일정 부분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을 거론한다.
다만 이를 단순한 수혜론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항공유 가격 상승은 정유사 수익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국제유가 급등은 원유 도입 비용을 높이는 부담 요인이기도 하다. 특히 중동 갈등이 장기화하거나 호르무즈 해협 통행 문제가 심화할 경우 원유 운송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IEA는 올해 글로벌 원유 공급이 예상보다 빠르게 감소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으며, 일부 투자은행들도 에너지 지정학 리스크가 커질 경우 국제유가가 급등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결국 유럽 항공업계가 우려하는 것은 단순한 연료 부족이 아니라 공급망 안정성이다. 지금은 버틸 수 있어도 중동 공급 차질이 길어질 경우 대체 조달 비용이 커지고 가격 변동성도 확대될 수밖에 없다. 그 빈틈을 누가 메우느냐에 따라 글로벌 정유 지형 역시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현 시점에서 한국 정유업계가 당장 유럽 항공유 시장의 핵심 공급자로 올라설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공급망 재편 국면에서 존재감이 커질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유럽 항공업계는 단기적으로 공급 안정 자신감을 보이고 있지만 구조적 불안은 여전하다”며 “중동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이어질수록 한국 같은 아시아 정제 허브 국가의 역할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