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남고 밀은 없다.. 곡물위기 속 한국 식량안보의 민낯

  • 등록 2026.02.12 15: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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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바구니 물가 흔드는 세계 곡물 위기 대처 시급
수입 의존 90%.. 한국의 구조적 취약성 단적으로 드러내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최근 들어 직장인 이모 씨(35)는 편의점에서 점심거리를 고를 때마다 가격표를 먼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몇 년 사이 라면과 빵, 과자 가격이 잇따라 오르면서 이 씨의 부담이 나날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1월, CJ제일제당과 삼양이 설탕과 밀가루 가격을 평균 5~6% 인하했지만 그 효력이 일반 서민들에게는 와닿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이는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같은 달 식품 물가는 전년 대비 2.9% 상승했고, 가공식품 물가도 2.8% 올랐다.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2%)보다 높은 수준이다. 더 심각한 것은 라면과 초콜릿, 고추장 등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품목의 가격 인상이다. 


이런 품목의 가격 인상은 소비자 심리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기에 체감 물가 상승률은 그보다 더 높게 느껴지는 것.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일부 원재료 가격이 내려가는 듯 보이지만, 식탁 물가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그 배경에는 국제 곡물 시장의 구조적 변동성이 자리하고 있다.


◆ 기후·분쟁·공급망 등 반복되는 충격에 곡물 시장 ‘휘청’

최근 몇 년간 세계 곡물 시장은 세 가지 요인이 겹치며 흔들려 왔다. 첫째는 기후변화다. 이상 고온과 가뭄, 홍수는 주요 곡창지대의 생산량 변동성을 키웠다. 수확량이 조금만 줄어도 국제 가격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둘째는 지정학적 리스크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밀 수출의 핵심 통로였던 흑해 곡물 운송을 흔들었다. 에너지 가격과 해상 운임 상승이 겹치면서 곡물 가격은 급등했다. 셋째는 공급망 불안정이다. 팬데믹 이후 물류 체계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국의 수출 제한 조치가 이어지며 가격 변동성이 커졌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26년 1월 발표에서 식품가격지수가 5개월 연속 하락했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팬데믹 이전 평균을 웃도는 수준이다. 국제 식량안보 분석기관 ‘FEWS NET’도 올해 2월 전망에서 8월까지 최대 1억3천만 명이 긴급 식량지원이 필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식량 문제는 더 이상 개발도상국만의 위기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 전반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이 같은 국제 변동성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한국은 밀과 옥수수의 90% 이상을 해외에서 들여온다. 반면 쌀은 공급 과잉 상태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연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9%로 2017년 이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쌀을 제외한 곡물자급률은 한 자릿수 수준에 머문다.


문제는 생산 구조와 소비 구조의 불균형이다. 1인당 쌀 소비량은 수십 년째 감소하고 있지만, 밀을 기반으로 한 가공식품 소비는 꾸준히 늘었다. 쌀은 남아돌고 밀은 해외에 의존하는 ‘이중 구조’가 고착된 셈이다.


이 구조는 가격 변동이 곧바로 가계에 전가되는 통로가 된다. 2025년 봄 오뚜기는 라면 가격을 평균 7.5% 인상했고, 농심 역시 주요 제품 가격을 7% 넘게 올렸다. 국제 밀 가격 상승과 환율 부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곡물 가격 변동이 몇 달의 시차를 두고 장바구니로 옮겨오는 구조다.


◆ 체감 물가와 심리적 불안에 떠는 서민들 울상

서울 강서구에 사는 주부 김모 씨(42)는 “밀가루와 설탕 가격이 내렸다고 해도 당장 크게 느껴지진 않는다”며 “라면이나 빵값이 오를 때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소비자에게 중요한 것은 ‘평균 수치’가 아니라 ‘자주 사는 품목의 가격’이다. 


가공식품 가격은 외식비와 편의점 물가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제빵업체, 분식집, 소상공인들은 원재료 가격이 오를 때마다 메뉴 가격을 조정해야 하고, 이는 다시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때문에 곡물 가격 불안정은 특히 저소득층 가계에 더 큰 부담이 된다. 식료품 지출 비중이 높은 계층일수록 가격 상승의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식량 문제가 단순한 물가 이슈를 넘어 사회적 불평등과도 연결된다고 말하는 이유다. 이미 이와 관련된 사회적 경험 역시 이루어졌던 바가 있다. 


2008년의 일이다. 2008년 세계 식량위기 당시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약 54%였다. 당시에도 라면과 빵 가격이 크게 올랐지만, 지금은 자급 기반이 더 약해졌다. 2022년 전쟁 여파로 밀 수입 가격이 급등했을 때 제분·제빵·라면 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비슷한 충격이 반복된다면, 현재의 구조에서는 가격 전가 속도가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


해법은 구조 전환에 있다. 정부는 밀 자급률 제고 사업과 전략 비축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단기간에 자급 기반을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다. 벼 재배 면적을 줄이고 다른 작물로 전환하는 정책도 농가 소득과 직결된 문제라 속도를 내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식량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곡물 수입선을 다변화해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밀과 콩 같은 전략 작물의 국내 생산 기반을 확대해 안정적인 공급망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저장과 비축 능력을 강화하고 유통 체계를 효율화해 가격 변동에 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달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APEC 식량안보 장관회의에서도 공급망 강화와 디지털 농업 혁신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한국 역시 기술 기반 생산성 향상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기술 혁신과 국제 협력이 실제 체감 안정으로 이어지려면, 소비 구조와 생산 구조를 동시에 재조정하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설탕과 밀가루 가격 인하로 숨통은 잠시 트였지만, 세계 곡물 시장의 변동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후 위기와 지정학적 갈등이 이어지는 한 충격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곡물 문제는 더 이상 먼 나라의 뉴스가 아니다. 라면과 빵 가격을 통해 매일 체감하는 현실이다. 지금의 수입 의존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다음 위기 때 장바구니 충격은 한층 더 클 수 있다.


손영남 기자 son364@entropy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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